
우리는 부모의 젊은 시절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우리를 키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고통을 견뎌야 했는지 우리는 사실 잘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부모를 늘 ‘부모의 모습’으로만 기억할 뿐, 그들 또한 한때는 우리처럼 불안하고 미숙한 시간을 지나온 한 사람의 청춘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떠올리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끔은 영화가 끝났는데도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때가 있죠. 화면은 이미 꺼졌지만 어떤 장면과 표정,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제게는 바로 그런 영화였습니다.
어려서 몰랐던 시간들
영화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습니다. 어린 소피와 아빠 칼럼은 오랜만에 단둘이 여행을 떠납니다. 여행지에 도착한 소피는 그저 여행을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마냥 들떠 있습니다. 오랜만에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고, 이곳저곳 여러 장소들을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달콤한 디저트와 아이스크림을 먹고, 수영장에서 만난 언니 오빠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관계를 맺기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이 여행에는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소한 순간들만으로도 소피에게는 충분히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저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평범한 하루를 보내는 것 자체가 어린 소피에게는 즐겁고 설레는 경험이 됩니다. 모든 것이 끝나고 여행이 끝날 무렵, 소피는 아버지에게 이번 여행이 너무 즐거웠다며 다음에 또 다시 오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결국 공항에서 두 사람은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그렇게 짧지만 소피에게는 오래 기억에 남을 여행이 끝이 납니다.

겉으로 보기에 이 여행은 그저 평범하고 행복한 휴가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단순히 밝은 순간들만을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여행의 장면들 사이사이에는 어딘가 설명하기 어려운 슬픔의 잔향이 남아 있습니다. 칼럼의 표정에는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불안과 피로가 비치고, 어떤 순간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이 조용히 드러나기도 합니다. 어린 소피는 그저 여행의 즐거움 속에 머물러 있지만, 관객은 점점 그 이면에 숨겨진 칼럼의 복잡한 감정들을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영화는 대부분 어린 시절 소피가 찍었던 캠코더 영상의 장면들을 통해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저는 이것이 소피가 바라보는 시각을 잘 드러내는 장치라고 느꼈죠. 소피는 어린 마음에 자신이 보고 싶었던 순간들, 행복하고 즐거웠던 장면들 위주로 카메라에 담아냅니다. 반면 영화는 그 카메라 밖에 존재했던 장면들 또한 함께 보여줍니다. 소피의 시선이 머무르지 않았던 순간들, 어린 그녀가 미처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표정과 감정들이 조용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소피가 그것을 외면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우리는 어릴 때는 알지 못했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캠코더에 담기지 않았던 장면들을 관객이 하나씩 마주하게 되면서, 마음 한편에서 서서히 다른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합니다. 이 여행이 마냥 행복한 시간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리고 칼럼이 무언가 깊은 슬픔을 조용히 감추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점점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됩니다.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장면
이러한 장면들은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어두운 공간과도 어딘가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음악만이 크게 울려 퍼지는 이 암흑과도 같은 공간 속에서 소피는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계속해서 아버지를 찾습니다. 하지만 칼럼은 언제나 소피와 멀리 떨어진 곳에 서 있고, 소피가 다가가려 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멀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치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에 서 있는 것 같은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저는 이 장면이 단순히 현실의 한 순간이라기보다는, 소피의 기억 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감정의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던 아버지의 감정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들이 시간이 지나며 다시 떠오르는 공간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 어두운 공간은 소피가 뒤늦게 떠올리게 된 기억의 한 장면일지도 모릅니다. 어린 시절에는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내면, 그리고 그 여행 속에 숨겨져 있었던 감정들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조금씩 이해하게 되는 과정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우리는 밝고 평범해 보였던 그 휴가의 기억 속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내면을 조금씩 마주하게 됩니다.
어른의 시선
이야기는 후반부, 현재로 돌아와 훌쩍 자란 소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제 소피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어느새 성숙한 어른이 되어 있습니다. 주변의 분위기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날은 아마 소피의 생일인 것처럼 보입니다. 방 안 바닥에는 여행에서 아버지가 사주었던 카페트가 깔려 있고, 소피는 문득 어떤 생각에 잠긴 듯 자신이 어린 시절 찍어두었던 캠코더 영상을 다시 돌려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이 영화가 무엇을 보여주고 있었는지를 비로소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 보여졌던 장면들은 단순히 어린 소피가 찍어둔 캠코더 영상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사이사이에 등장했던 수많은 장면들은 사실 객관적인 사건의 기록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 어른이 된 소피가 다시 떠올리고 있는 기억의 조각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소피가 자신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어가는 과정을 함께 바라보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칼럼이 왜 바다로 걸어 들어갔는지, 왜 혼자 조용히 울고 있었는지, 왜 돈 문제로 힘들어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지에 대해 어렴풋이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의 소피는 그것을 온전히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같은 기억을 다시 바라보는 지금의 소피는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의 감정들을 조금씩 읽어내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 장면들은 어린 소피가 보지 못했던 순간들이자, 어른이 된 소피가 뒤늦게 떠올리며 이해하게 되는 아버지의 잔향 같은 기억들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통해 소피는 이제서야 아버지 칼럼이라는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단순히 자신의 부모로서 존재했던 사람이 아니라, 그 역시 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던 인간이었고,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한 슬픔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애프터썬
애프터썬은 선크림과는 달리, 햇빛에 그을린 피부를 진정시키기 위해 바르는 크림입니다. 이 영화와 소피의 행동이 어쩐지 그런 모습처럼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 여행은 아버지와 함께했던 마지막 휴가였던 것 같습니다. 현재의 소피가 보여주는 행동과 눈빛을 미루어 보았을 때, 그 상실의 기운은 칼럼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조용히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소피는 그 마지막 휴가 이후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아버지의 행적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다시 되짚어보게 됩니다. 어쩌면 그 순간, 그녀의 기억 역시 조금이나마 치유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어른이 된 소피가 어두운 공간에서 아버지를 붙잡고 껴안는 장면처럼 말입니다.
다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은 시간이 지나며 다시 만들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조금씩 미화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영화 속에서 소피가 떠올리는 기억들 역시 완전히 객관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결국 영화 내내 소피가 만들어낸 기억들조차 100% 완벽한 아버지의 모습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죠. 완전히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셈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소피가 이제서야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소피는 캠코더 프레임 밖에 있었던 아버지의 모습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기억해내려 합니다. 그 기억 속에는 행복했던 순간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웠던 아버지의 모습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녀는 아버지를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어렸을 때는 전혀 할 수 없었던, 어른이 된 그녀만의 방식으로 말입니다.
우리도 언젠가 삶 속에서 미해결된 기억들을 다시 마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그 기억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뒤늦은 이해와 함께, 짙은 여운만을 마음속에 남기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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