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에게 히어로 영화라는 것은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장르입니다. 혹자는 이것을 시네마가 아니라고도 하지만, 그만큼 히어로 영화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강하게 작동하는 장르이기도 하죠. 그리고 잘 만든 히어로 영화는 감동, 재미, 의미와 상징까지 모두 놓치지 않으면서, 단순한 오락영화를 넘어 하나의 웰메이드 영화로서 그 가치를 제대로 증명해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히어로는 아마 스파이더맨일 것입니다. 지금처럼 MCU 시리즈가 극장가를 완전히 히어로 테마로 물들이기 전부터, 스파이더맨은 오랜 시간 영화화되었고, 이미 몇 번의 세대교체를 거치면서도 우리 마음속에 가장 깊게 남아 있는 히어로가 되었죠. 그리고 그런 스파이더맨이기에, 누군가는 절대 벼락치기로는 느낄 수 없다고 했던 그 거대한 감정의 빅 이벤트, <노 웨이 홈>은 단순한 신작 이상의 영화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 우리의 추억을 다시 불러내고, 그 추억이 지금의 감정과 맞닿는 순간 결국 눈물 한바가지를 쏟게 만들었던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왜 단순한 히어로 영화를 넘어 하나의 유난히도 큰 감동의 사건처럼 남게 되었을까요?
밑바닥으로 가는 이유
우리에게 세 번째 피터 파커인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이 영화의 시작부터 매우 곤란한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미스테리오의 계략으로 정체가 세상에 폭로된 스파이더맨은, 그 이후 자신에게 어떤 혼란이 닥쳐올지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합니다. 언론과 군중은 순식간에 그를 향해 몰려들고, 피터 개인의 삶은 물론 MJ와 네드의 일상, 심지어 입시와 미래까지 한꺼번에 흔들리기 시작하죠. 이때의 피터는 거대한 영웅이라기보다, 하루아침에 사생활과 평범한 일상을 빼앗겨버린 한 명의 10대로 먼저 보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진짜 출발점은 멀티버스가 열리고 다른 차원의 빌런들이 밀려들어오는 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터가 더 이상 예전과 같은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감각에 있습니다. 영화는 이 붕괴를 생각보다 훨씬 집요하게 보여주고, 바로 그 무너진 자리 위에 이후의 거대한 사건들을 차근차근 쌓아 올립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의 초반부가 우리에게 먼저 각인시키는 것은 빌런의 귀환이나 세계관의 확장이 아니라, 한 소년의 삶이 얼마나 빠르게 망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감각에 더 가깝습니다.
MCU가 진행되면서 스트릿 레벨을 벗어나 우주적인 스케일의 사건들에 자주 휘말렸던 피터 파커는, 이 영화에 이르러 다시금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그리고 과연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가 왜 오랫동안 사랑받아왔는지를 되묻게 만듭니다. 이 작품은 그 본질적인 질문에 거창한 선언으로 답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무너져가는 일상, 그 안에서 피터가 감당해야 하는 선택과 대가, 그리고 끝내 이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는 과정을 통해 그 질문에 장면으로 대답하듯 천천히 밑받침을 깔아가는 영화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진짜 충격은 단순히 빌런의 귀환이나 멀티버스의 확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터 파커라는 인물이 다시 한 번 스파이더맨의 가장 본질적인 자리로 밀려 들어가게 되는 과정 그 자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스파이더맨'이란 무엇인가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적인 기원을 길게 다룬 작품의 주인공은 아니었습니다.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처음 등장한 순간부터 그는 이미 완성된 슈트를 입고 있었고, 스파이더맨으로서 당당하게 우리 앞에 나타났죠. 다시 말해 그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고전적인 의미의 ‘스파이더맨이 되어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충분히 통과한 뒤 등장한 인물이라기보다, 이미 더 큰 세계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피터 파커에 더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언제나 활기차고 매력적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의 스파이더맨과는 아직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렇기에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단순히 멀티버스를 활용한 거대한 이벤트 영화로만 보는 것은, 어쩌면 이 작품을 가장 겉면에서만 읽는 방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영화는 우리의 과거의 향수를 강하게 불러일으키고, 오랜 시간 쌓여온 스파이더맨의 기억들을 한꺼번에 터뜨리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외형 아래에서 이 영화가 진짜로 하고 있는 일은, 왜 하필 스파이더맨인가, 그리고 스파이더맨이라는 히어로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묻는 데에 더 가깝습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과거를 불러오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과거를 거울처럼 사용해 지금의 피터 파커가 어떤 영웅이 되어야 하는지를 끝내 다시 확인하게 만드는 영화입니다.
결국 이 영화는 과거를 불러와 크게 축제를 벌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과거를 통해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를 다시 가장 본질적인 자리로 밀어 넣습니다. 누군가의 후광이나 시스템 안에 놓인 영웅이 아니라, 상실과 책임을 자기 힘으로 감당해야 하는 한 명의 스파이더맨으로 다시 세우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멀티버스 쇼라기보다, 오히려 늦게 도착한 기원 서사에 가깝습니다. 이 영화가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유도 단지 추억을 건드려서가 아니라, 그 추억을 발판 삼아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를 비로소 우리가 알고 사랑해온 스파이더맨의 자리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Home'의 의미
돌이켜보면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 시리즈는 처음부터 제목에 계속해서 ‘home’을 달고 있었습니다. <스파이더맨: 홈커밍>,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 그리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 얼핏 보면 그저 시리즈의 통일감을 위한 작명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세 편을 다 보고 나면 이 ‘home’이라는 단어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왜냐하면 이 시리즈에서 home은 단순히 퀸즈라는 물리적인 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피터가 피터 파커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던 삶의 자리 전체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는 메이 숙모가 있고, MJ와 네드가 있고, 학교와 동네가 있고, 해피와 스타크의 시스템도 있습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봐주고 불러주고 기억해주는 관계들, 그리고 그 관계들 속에서 아직 평범한 소년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이 시리즈에서의 home이었던 셈이죠. 그래서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의 제목은 단순히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더 이상 예전과 같은 관계와 정체성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쪽에 더 가깝게 읽힙니다. 이 영화에서 피터가 잃어가는 것은 단순한 안전이나 익명성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삶의 구조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앞선 두 제목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스파이더맨: 홈커밍>은 말 그대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피터가 거대한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결국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인해가는 영화였습니다. 반대로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은 집에서 멀어진 상태, 다시 말해 토니 스타크의 죽음 이후 자신이 감당해야 할 기대와 혼란 속에서 흔들리는 피터를 보여주는 제목에 가까웠죠. 그리고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 이르면 그 흔들림은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상실로 이어집니다. 이제 home은 돌아가야 할 곳이라기보다, 이미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고 결국에는 되돌릴 수 없게 되어버린 어떤 것이 됩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이 더 크게 남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작은 방, 손으로 직접 만든 새 슈트, 그리고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계는 겉으로만 보면 너무 쓸쓸하고 초라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하게 다가옵니다. 이전의 피터가 수많은 관계와 시스템 속에서 지탱되던 인물이었다면, 마지막의 피터는 그 모든 것을 잃고도 여전히 스파이더맨이기로 남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home’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집이었는지를 가장 아프게 드러내는 방식으로 완성된다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깊게 몰아치는 영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톤으로만 밀어붙이는 작품이 아닙니다. 초반부는 정체가 폭로된 뒤 언론과 군중, 학교와 입시, 연애와 우정까지 한꺼번에 흔들리는 하이틴 소동극이자 미디어 패닉에 가까운 리듬으로 출발하죠. 그러다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이 개입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순식간에 판타지적 사고극으로 방향을 틀고, 멀티버스의 균열이 열리면서부터는 익숙한 빌런들이 밀려드는 거대한 이벤트 영화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중반 이후에는 이들을 죽음으로 돌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살려내려 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윤리적인 갈등으로 또 한 번 얼굴을 바꿉니다. 단순히 장르가 많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이 영화는 장르를 계속 갈아타면서, 그때마다 피터 파커의 감정을 한 단계씩 더 깊은 곳으로 끌고 내려갑니다.

특히 중요한 건 이런 형식의 변화가 단순히 볼거리의 확장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초반의 소란은 피터의 일상이 무너지는 불안으로 작동하고, 중반의 판타지적 혼란은 그 불안이 이제는 되돌리기 어려운 차원으로 넘어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빌런들을 치료하려는 선택이 본격화되는 순간부터 이 영화는 단순한 액션 블록버스터가 아니라, 스파이더맨이 끝까지 붙들고자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시험하는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그래서 후반부에 이르면 이 작품은 상실 이후의 성장담이자, 서로 다른 시간과 상처를 안고 살아온 스파이더맨들이 한 자리에 모여 서로를 비춰보는 이야기처럼까지 확장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영화의 규모는 점점 커지는데 감정은 오히려 점점 더 한 사람의 외로움 쪽으로 좁혀 들어간다는 점입니다. 빌런도 많고, 사건도 커지고, 무대도 커지는데, 정작 이 영화가 끝날수록 더 또렷해지는 것은 피터 한 사람에게 남겨진 책임과 상실의 무게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처음에는 분명 떠들썩하고 반가운 영화처럼 보이지만, 보고 나면 단순히 신나는 이벤트로만 남지 않습니다. 그 화려한 외형을 지나고 나면, 결국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조용하고도 쓸쓸한 멜랑콜리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방식이 항상 매끈하게만 작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워낙 많은 것을 끌어안고 있어서 순간순간 다소 빽빽하고 복잡하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 점 때문에, 피터의 삶이 한순간에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뒤엉켜버린 상태 역시 더 강하게 체감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분주함은 단순한 과잉이라기보다, 피터가 겪는 혼란과 감정의 밀도를 형식 자체로 체험하게 만드는 방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피터의 결함
이 영화에서 피터의 문제를 단순히 어리숙함이나 미숙함으로만 보는 것은 조금 아쉬운 읽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는 여전히 어린 인물이고, 판단이 흔들리고, 감정적으로 서두르는 순간도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더 중요하게 보여주는 것은, 피터가 단순히 덜 자란 아이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한 의도만 있다면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까지도 생각보다 빠르고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이 영화가 건드리는 피터의 결함은 악의가 아니라 조급함에 더 가깝고, 무책임이라기보다 책임을 너무 쉽게 완수할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함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는 입시 문제를 마법으로 해결하려 하고, 멀티버스로 넘어온 빌런들 역시 죽음으로 돌려보내기보다 모두 구해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이 작품은 그 조급함을 아주 노골적으로 드러냅니다. 피터는 학교를 직접 설득하거나 전화로 탄원해보는 가장 기본적인 절차조차 제대로 밟지 않은 채, 곧바로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기억을 바꾸는 마법부터 부탁하죠. 더 나아가 사랑도, 우정도, 자신의 일상도, 영웅으로서의 윤리도 끝까지 전부 놓치지 않은 채 지켜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죠. 그런데 바로 그 믿음이야말로 이 영화가 피터에게 가장 가혹하게 되돌려주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피터가 바라는 것처럼 한 번의 결단이나 한 번의 선의만으로 정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피터의 착함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그 착함을 지켜줍니다. 다만 그 착함이 현실의 대가를 건너뛸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순수한 미덕만으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비극은 단순히 운이 나빠서 닥쳐온 사건처럼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피터가 세상을 너무 쉽게 구할 수 있다고 믿었던 방식, 다시 말해 누구도 잃지 않고도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던 사고방식이 무너지는 과정에 더 가깝습니다. 이때부터 이 영화는 단순한 사건의 비극을 넘어, 한 사람의 믿음이 붕괴되는 이야기로 더 깊어집니다. 피터는 선한 마음을 잃어서가 아니라, 선한 마음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세계의 무게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후의 선택들이 더 중요해집니다. 이 작품에서 피터가 배우는 것은 단순히 “착하면 안 된다” 같은 냉소가 아닙니다. 오히려 끝까지 스파이더맨으로 남기 위해서는, 선의를 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선의가 요구하는 대가까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에 더 가깝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피터에게 책임의 의미를 다시 가르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있어야, 이후에 찾아오는 상실과 마지막 결단 역시 단순히 슬픈 비극이 아니라, 피터 파커라는 인물이 정말로 이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넘어가는 순간처럼 읽히게 됩니다.
그린 고블린과 메이 파커
이 영화에서 진짜 핵심은 닥터 스트레인지도, 멀티버스 그 자체도, 심지어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한자리에 모이는 감동의 순간만도 아닙니다. 결국 가장 깊은 자리에서 충돌하는 것은 그린 고블린과 메이 파커가 피터 앞에 내미는 서로 다른 윤리에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그린 고블린은 단순히 강하고 위협적인 빌런이 아니라,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가 끝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가치를 정면으로 비트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힘은 감당해야 할 책임이 아니라,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선물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가 던지는 “이것들은 저주가 아니야. 선물이야”라는 말은 단순한 악당의 허세가 아니라, 스파이더맨 서사의 가장 중요한 감각을 뒤집어버리는 선언처럼 들립니다. 원래 이 세계에서 힘은 선물이면서 동시에 저주였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책임과 연결될 수밖에 없었는데, 고블린은 그 연결 자체를 끊어버리려 하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는 피터 앞에 나타난 적인 동시에, 스파이더맨 윤리의 반대편에 선 존재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메이는 이 영화에서 피터를 단순히 위로하고 보호하는 인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너무 커져버린 사건 속에서 피터가 끝내 놓지 말아야 할 기준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는 인물에 더 가깝습니다. 세상이 이미 너무 복잡해졌고, 눈앞의 문제를 힘으로 정리해버리는 편이 훨씬 쉬워 보이는 순간에도, 메이는 끝까지 사람을 구하는 쪽을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단순히 “왜 메이가 죽어야 했는가”가 아니라, “왜 하필 그린 고블린이 메이를 죽여야 했는가”에 있습니다. 스파이더맨의 윤리를 가장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뒤집는 존재가, 바로 그 윤리를 피터에게 다시 넘겨주는 인물을 쓰러뜨린다는 점에서 이 장면은 단순한 충격 이상의 의미를 갖게 됩니다. 더구나 고블린은 그 순간조차 피터에게 “호의는 항상 화를 부르는 법”이라고 조롱하죠. 그러니까 그는 메이를 죽이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을 구하려는 선택 자체가 결국 너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비웃는 셈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은 훨씬 더 잔인하고도 결정적으로 다가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메이의 죽음은 그저 슬픈 비극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이 순간은 피터가 가장 개인적인 상실을 통해, 앞으로 어떤 영웅으로 남을 것인지 시험받는 자리로 바뀝니다. 분노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복수는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반응처럼 보이지만, 이 영화는 바로 그 갈림길 위에 피터를 세워둡니다. 다시 말해 이 장면은 피터를 무너뜨리는 장면인 동시에, 그를 도덕적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드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린 고블린은 힘과 분노의 논리로 피터를 끌어내리려 하고, 메이는 마지막까지 스파이더맨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남깁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심장은 결국 여기서 뜁니다. 누가 더 강한가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처절하게 무너진 순간에도 끝내 무엇을 지킬 것인가의 문제 말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있어야 뒤이어 이어지는 피터의 분노, 다른 스파이더맨들의 개입, 마지막 선택까지도 단순한 전개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인 결론처럼 읽히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가움을 넘어서
이 영화에서 누구나 가장 크게 들뜨고, 또 극장에서 가장 크게 반응했던 장면을 꼽자면 역시 이 인물들의 재등장일 것입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측하고 있었고, 어쩌면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었던 장면이었죠. 그런데도 막상 그것을 눈앞에서 직접 보게 되는 순간의 감정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극장에서 이들이 다시 등장했을 때 관객들이 환호하고, 웃고, 울컥했던 이유도 단순히 “드디어 나왔다”는 반가움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랜 시간 각자의 방식으로 스파이더맨을 기억해온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했던 시간과 다시 마주하는 순간에 더 가까웠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한 캐릭터의 귀환이라기보다, 각자 마음속에 남아 있던 스파이더맨의 시간이 다시 현재로 돌아오는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더 칭찬받을 수 있었던 지점은, 그 반가운 재등장을 그저 추억팔이나 팬서비스로만 소비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세 명의 스파이더맨을 한 프랜차이즈의 상징처럼 나란히 세워두는 데서 멈추지 않고, 각자가 겪어온 실패와 상실, 그리고 아직 다 끝내지 못한 감정을 서로에게 건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이들의 만남은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라,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피터 파커들이 비로소 자기 상처를 이해받는 순간처럼 느껴집니다. 이들이 서로를 처음 만난 것 같으면서도 누구보다 빨리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겠죠. 같은 힘을 가졌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힘 때문에 결국 무엇을 잃어야 했는지까지 너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반가움은 인물들 안에서도 다시 살아납니다. 한때 깊은 갈등 속에 있었던 피터와 옥토퍼스가 다시 만나, 더 이상 예전의 적대감만으로 서로를 보지 않는 그 순간은 그래서 단순한 오마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다시 보며 느끼는 반가움과, 이 인물들이 시간을 건너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느끼는 반가움이 이상할 만큼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서 이 영화의 감동은 “함께 싸운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전에 먼저 서로의 아픔을 알아보고 받아준다는 데에 더 가깝습니다. 한 스파이더맨은 끝내 구하지 못했던 사람을 다른 자리에서 다시 구해내고, 또 다른 스파이더맨은 분노로 무너질 뻔한 피터를 몸으로 막아섭니다. 그 순간들은 단순한 서비스 장면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 서사를 다시 통과하면서 다른 피터의 상처까지 함께 붙잡아주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드디어 셋이 뭉쳤다”는 카타르시스만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두 번째 기회가 되어주는 이야기로까지 나아갑니다. 누군가는 구하지 못했던 사람을 다시 구하고, 누군가는 오래전에 지나온 상실로 지금의 피터를 붙잡아주며, 누군가는 자기보다 어린 스파이더맨이 끝내 무너지지 않도록 곁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들은 반가움을 넘어서 더 깊고, 더 오래 남게 됩니다. 이 영화가 진짜로 건드리는 것은 팬들의 추억 그 자체라기보다, 그 추억 속에 남아 있던 상처와 미련, 그리고 끝내 다 하지 못했던 마음들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음악과 오마주
앞서 말한 그 반가움이 이 영화에서 오래 남는 이유는, 익숙한 장면과 대사와 인물들이 여기서 단순한 재등장으로만 쓰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작품들이 이런 순간을 만들 때 “기억나지?” 하고 관객의 추억을 바로 눌러버리는 쪽으로 가는데, 이 작품은 그보다 조금 더 집요합니다. 과거의 스파이더맨 영화들을 다시 불러오긴 하지만, 그것을 박제된 추억처럼 진열하지는 않죠. 오히려 지금의 피터 파커가 어떤 상실과 책임 앞에 서 있는지에 맞춰 다시 배열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오마주는 단순히 알아보면 재밌는 장치가 아니라, 지금 이 장면이 왜 이렇게까지 아프고 반갑고 울컥하게 느껴지는지를 설명해주는 감정의 문법처럼 작동합니다.
이 점은 샘 레이미 트릴로지 쪽 오마주에서 특히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서 보여줘, 타이거”, “나도 나름 과학자거든”, “이것들은 저주가 아니야. 선물이야” 같은 대사들은 그냥 반가운 밈 회수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특히 고블린의 “선물이야”라는 말은 스파이더맨 서사에서 힘이 선물이면서 동시에 저주였고, 결국 그 힘을 책임으로 감당해야 한다는 흐름을 정면으로 뒤집어버립니다. 닥터 옥토퍼스가 다시 “태양의 힘을 내 손안에”라는 익숙한 집착의 언어를 끌고 나오는 순간도 마찬가지죠. 이 인물들은 단순히 옛 악당으로 재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한때 스파이더맨이 맞서야 했던 비극적 욕망과 가치관 자체를 다시 현재 안으로 끌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오마주는 과거를 그대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감정과 윤리를 지금의 갈등 안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방식에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더 크게 다가오는 건, 이런 오마주가 대사나 구도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샘 레이미의 피터 파커와 닥터 옥토퍼스는 2편에서 갈등을 빚은 채 끝났던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이 영화에서는, 그 갈등이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치유된 상태에서 서로를 다시 바라보게 되죠. 옥토퍼스가 어떻게 지내냐고 묻고, 피터가 그럭저럭 버텨내며 살아가고 있다는 듯 답하는 그 짧은 순간은 그래서 이상할 정도로 크게 남습니다. 그건 단지 옛 캐릭터를 다시 본다는 반가움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서로를 다시 마주한 인물들 사이의 반가움이기도 해서, 결국 우리가 이들을 다시 보는 감정과도 너무 닮아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운 것이죠. 마치 우리 역시 이 인물들과 긴 시간을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나는 것 같고, 영화 속 인물들 역시 우리와 비슷한 감정으로 서로를 다시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메이의 묘 앞에 서는 구도나, 홀로 방세를 걱정해야 하는 피터의 자리까지 생각하면, 이 영화는 결국 톰 홀랜드의 피터 역시 그 상실과 외로움의 계보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까지 조용히 보여줍니다.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쪽 오마주도 단순한 팬서비스로 보기에는 훨씬 더 감정적으로 깊습니다. 앤드루 가필드의 피터가 MJ를 구해내는 순간이 강하게 들어오는 이유는 단순히 “이번에는 살렸다”는 통쾌함 때문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그가 한 번 구하지 못했던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장면은 현재의 MJ를 구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그웬을 끝내 붙잡지 못했던 자기 자신의 실패를 다시 통과하는 순간처럼 느껴지죠. 이 영화가 영리한 건 바로 이런 부분입니다. 똑같은 장면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고통의 형태를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마주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마주는 정보가 아니라 상처의 기억처럼 작동하고, 이 인물들이 왜 서로를 그렇게 빨리 이해할 수 있는지도 자연스럽게 설명됩니다.

음악은 그 모든 것을 훨씬 더 조용하고도 강하게 묶어줍니다. 특히 Shield of Pain 같은 곡이 인상적인 건, 익숙한 정서를 대놓고 과시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간의 스파이더맨들이 지금 이 피터의 감정 안으로 스며드는 느낌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음악은 “봐, 예전 그거 기억나지?” 하고 손가락질하는 쪽이 아니라, 오래전에 익숙해진 감정을 현재의 상실과 연대 안으로 다시 흘려보내는 통로처럼 들립니다. 결국 이 작품의 음악과 오마주가 촌스럽게 멈추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과거를 자랑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감정을 지금의 피터에게 다시 통과시키는 데 더 관심이 있습니다. 반가운 얼굴과 익숙한 선율, 오래된 대사와 구도들이 오래 남는 것도 결국은 그것들이 추억 그 자체이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이 피터를 다시 스파이더맨의 본질 쪽으로 밀어 넣는 데 정확히 쓰이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연출, 무엇을 보여주려고 애쓰는가
이 영화의 액션을 이야기할 때 단순히 스케일이 크다거나, 볼거리가 많다는 식으로만 정리하는 것은 조금 아쉬운 접근처럼 느껴집니다. 이 작품의 액션이 인상적인 이유는 단순히 화면을 크게 쓰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장면마다 피터 파커가 어떤 인물인지를 함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가 바로 미러 디멘션 추격전입니다. 이 장면에서 피터는 닥터 스트레인지와 힘으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뒤틀린 공간의 구조를 빠르게 읽고 계산하면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냅니다. 즉 이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 피터가 단순히 힘이 좋은 히어로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공간을 이해하고 판단할 줄 아는 인물이라는 점까지 함께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장면의 재미는 단순한 현란함에 있지 않고, 스파이더맨이라는 캐릭터가 몸만 빠른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빠르게 움직이는 존재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확인하게 만든다는 데에 더 가깝습니다.

또 하나 빼놓기 어려운 건 메이의 죽음 직전 벌어지는 그린 고블린과의 아파트 전투입니다. 이 장면이 강하게 남는 이유는 단순히 거칠고 아프게 찍혀서가 아니라, 이 작품이 그린 고블린을 얼마나 물리적으로도 위협적인 존재로 되살려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피터는 더 이상 여유 있게 농담을 주고받는 히어로가 아니라, 압도적인 힘 앞에서 그대로 짓눌리고 끌려다니는 소년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이 전투는 단순한 액션 장면이 아니라, 피터가 정말로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순간을 몸으로 체감하게 만드는 연출에 더 가깝습니다.
반대로 자유의 여신상에서 벌어지는 마지막 전투는 이 영화가 액션을 통해 무엇을 지키려 하는지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러 빌런과 세 명의 스파이더맨이 한꺼번에 결집하는 거대한 클라이맥스처럼 보이지만, 이 장면의 진짜 핵심은 누가 더 강하게 때리고, 누가 더 화려하게 싸우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끝까지 빌런들을 죽이지 않고 치료하려는 목적을 유지할 수 있는가, 그리고 상실과 분노를 겪고도 끝내 스파이더맨의 윤리를 놓지 않을 수 있는가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마지막 액션은 단순한 승부라기보다, 피터가 어떤 방식으로 싸울 것인가를 끝까지 시험하는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 점에서 이 작품의 액션은 스펙터클이면서 동시에 성격 묘사이기도 하고, 전투이면서 동시에 윤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미러 디멘션에서는 피터의 기민함과 사고력이 드러나고, 마지막 전투에서는 그가 어떤 영웅으로 남을 것인지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액션은 크기만 남는 장면이 아니라, 결국 피터 파커라는 인물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장면들처럼 느껴집니다.
돌아갈 수 없기에, 스파이더맨
톰 홀랜드의 피터 파커는 결국 이 모든 여정의 끝에서 크나큰 상실의 아픔과 마주하게 됩니다. 우스갯소리로야 ‘겁나게 작은 힘에 겁나게 큰 책임’이라는 말도 하지만, 어쩌면 이 영화가 끝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우스갯소리조차 가볍게 넘길 수 없게 만드는 어떤 진심에 더 가깝습니다. 이 작품을 거치며 저는 다시 한 번 스파이더맨이 어떤 영웅인지, 우리가 오래 사랑해온 스파이더맨이라는 존재가 결국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조금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삼스파가 다시 만나 우리의 추억을 꺼내오고, 서로의 상처를 나누며 그 치유의 과정에서 우리 역시 눈물을 흘리게 되는 순간들도 분명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마지막까지 가서 끝내 남기는 것은 단지 그리움이나 반가움만이 아니라, 결국 스파이더맨이라는 영웅은 상실과 책임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우리가 사랑해온 그 숭고한 의미를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결말은 단순히 슬픈 비극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모두가 피터를 잊게 되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을 말할 수도 있었지만 끝내 말하지 못한 채 돌아서죠. 그 침묵은 단순한 체념이라기보다, 자신이 겪은 상실과 위험을 더 이상 MJ와 네드에게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방식의 책임처럼 느껴집니다. 곁에 두었던 친구들을 잃고, 한때 자신을 지탱해주던 관계와 이름들을 모두 뒤로한 채, 혼자 사는 작은 방으로 들어가 다시 슈트를 매만집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그가 모든 것을 잃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바로 그 대가를 치르고 난 뒤에야 이 피터 파커가 비로소 그 누구의 후광도 아닌 자기 자신의 무게로 서 있는 스파이더맨처럼 보이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이 마지막은 삭제라기보다 성립에 가깝고, 상실이라기보다 형성에 더 가까운 순간인 셈입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웹스윙을 하며 날아가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였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눈 내리는 도시 위를 가르는 그 모습은 단순히 멋있는 히어로의 실루엣이라기보다, 수많은 것들을 잃고도 끝내 다시 날아오르기로 한 한 사람의 결심처럼 보입니다. 커피숍에서 끝내 말을 삼키는 망설임, 손으로 다시 꿰매어 만든 슈트의 푸른 빛, 아무도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차가운 도시의 공기 같은 것들이 그 장면을 더 아프고도 선명하게 만들죠. 그래서 그 마지막은 화려한 승리의 이미지가 아니라, 너무 늦게 도착했지만 결국 자기 자리를 찾아낸 스파이더맨의 이미지에 더 가깝게 느껴집니다.

안타깝지만, 그래서 더 숭고합니다. 곁에 두었던 친구들을 잃고, 슬픔 속에서 다시 태어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로 돌아가서도 끝내 다시 스파이더맨이 되기를 선택하는 그 영웅이야말로 우리가 오래 사랑하고, 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스파이더맨이라는 것이 가슴으로 와닿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가 마지막에 남기는 감정도 아마 그래서일 것입니다. 슬프지만 무너지지 않고, 외롭지만 초라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스파이더맨다운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것. 그래서 마지막에 눈 내리는 도시 위로 다시 날아오르는 그 작은 푸른 실루엣은, 단순한 엔딩 장면이 아니라 너무 늦게 도착했지만 끝내 자기 자리를 찾아낸 스파이더맨의 모습처럼 오래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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