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workingtitle 2026. 4. 14. 14:19

 

 이 작품을 감상하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감상은 단순히 저라는 한 사람 안에서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확장해서 보면 결국 이 영화가 붙들고 있는 주제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도 닿을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은 욕망,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를 되묻게 되는 순간들. 이 영화는 그런 무겁고도 어두운 질문들을 아주 집요하게 붙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영화가 그런 주제들을 정면으로만 밀어붙이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원테이크처럼 보이는 형식이나 현란한 연출로 먼저 기억하겠지만, 막상 끝까지 보고 나면 더 강하게 남는 것은 기술 그 자체보다도 숨막힘에 가까운 감정입니다. 초조함, 자의식, 추락 직전의 불안,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의식하게 되는 어떤 감각. 이 영화의 형식은 단순한 볼거리라기보다는, 그런 인물의 상태를 관객이 거의 몸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장치처럼 느껴졌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무겁고 복잡한 주제를 블랙 코미디라는 방식으로 풀어낸다는 점이 이 작품을 더 묘하게 만들었습니다. 에고와 인정욕구, 예술과 대중성, 내가 원하는 나와 남들이 보는 나 사이의 간극 같은 것들은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닌데, 이 영화는 그것을 우습고도 비참하게, 때로는 황당할 정도로 날카롭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오히려 받아들이기가 더 쉬워지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무언가를 성급하게 결론 내리거나, 이것은 이것이다 하고 단정하기 전에, 일단 이 영화가 던지는 감각과 질문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따라가다 보면 조금 더 쉽게 영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친절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참신한 시도들과 인물의 불안, 과장된 연극성, 우스꽝스러움과 처절함을 한꺼번에 밀어넣으면서 관객에게 끝없이 묻습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무엇을 진짜라고 믿어야 하는가, 무엇이 더 나은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어쩌면 꽤 폭력적인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답을 주기보다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게 만들고, 그 과정에서 결국 에고와 인정욕구, 존재에 대한 갈증 앞에 잠시 멈춰 서게 만드는 영화. 저에게 <버드맨>은 바로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자기 안에 유령이 있는 사람

 

 주인공 리건 톰슨을 단순히 한때 잘나갔다가 몰락한 배우로만 보면, 이 인물은 생각보다 너무 평면적으로 보이게 됩니다. 물론 영화는 분명 그런 인상으로 시작합니다. 한때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머쥐었지만, 이제는 과거의 이름으로만 간신히 기억되는 배우. 그는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리며 다시 한번 자신을 증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리건은 단순한 ‘퇴물 배우’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 안에서 여러 자아가 서로 충돌하며 흔들리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버드맨입니다. 대중성, 돈, 상업성, 거대한 성공, 그리고 사람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결국 이런 것 아니냐고 조롱하듯 속삭이는 목소리. 그 옆에는 이번만큼은 진짜 의미 있는 일을 해내고 싶어 하는 리건 자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한편에는, 한때는 유명했지만 지금은 끝난 사람, 더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놓여 있습니다.

 

 

 영화는 이 세 가지 자아가 서로 부딪히며 리건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과정을 집요하게 따라갑니다. 프리뷰는 계속 꼬이고, 마이크 샤이너는 리건의 불안과 열등감을 정면으로 건드리며, 딸 샘은 아버지의 공허함을 너무도 정확하게 찔러버립니다. 평론가 타비사는 아예 리건이라는 존재를 예술의 바깥으로 밀어내려 합니다. 결국 리건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런 모든 일들이 자기 안의 버드맨과 계속 공명한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리건은 과거의 성공을 그리워하는 인물이라기보다, 과거의 자신에게 아직도 잠식당하고 있는 인물처럼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마이클 키튼의 캐스팅은 단순한 메타적 농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과거에 배트맨을 연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한 배우가 과거에 맡았던 이미지가 현재의 자아를 어떻게 유령처럼 따라다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 영화는 그 메타성을 영화 바깥의 재치로 소비하지 않고, 리건이라는 인물의 정신 안으로 밀어 넣습니다. 그래서 버드맨은 리건이 벗어던져야 할 오래된 배역이 아니라, 끝내 자기 자신과 분리되지 않는 자아의 한 부분처럼 느껴집니다.

 

왜 브로드웨이가 중요할까?

 

 리건이 예술을 하려 한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제가 이 영화를 보면서 더 크게 느꼈던 것은 그것이 왜 하필 브로드웨이여야 했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브로드웨이는 촬영장이 아닙니다. 잘못되면 다시 찍을 수 있는 공간도 아니고, 편집으로 정리할 수도 없는 장소입니다. 모든 것이 라이브이고, 실시간으로 벌어지며, 그 순간의 긴장과 실수, 흔들림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에서 브로드웨이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리건이라는 인물이 자기 존재 전체를 올려놓고 심판받는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공포는 단순히 공연을 망칠까 두렵다는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배우가 살아 있는 무대 위에서 느끼게 되는 훨씬 더 적나라한 공포에 가깝습니다.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 언제든 실수할 수 있다는 감각, 머리가 하얘지는 순간, 준비한 모든 것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압박. 이 영화는 그런 종류의 공포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여주려 합니다. 그렇기에 저는 이 영화가 꽤 폭력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관객에게도 그 숨막힘과 노출감을 거의 그대로 전달해버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묘한 것은, 바로 그런 폭력성 때문에 이 공간이 동시에 강한 유혹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끝없이 긴장시키고, 극한까지 몰아붙이고, 한순간에 무너질 수도 있게 만드는 곳이면서도, 반대로 거기서 단 한 번의 성공, 단 한 번의 폭발적인 인정, 단 한 번의 절정에 도달하면 그곳은 구원의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그래서 브로드웨이는 단순한 무대가 아니라, 극한의 긴장 끝에만 닿을 수 있는 고양의 공간처럼 느껴집니다. 러너에게 러너스 하이가 있듯이, 배우에게도 그런 공포를 뚫고 나갔을 때만 닿을 수 있는 어떤 순간이 있는 것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건에게 브로드웨이는 가장 잔인한 장소이면서도, 끝내 포기할 수 없는 장소가 됩니다. 그곳은 그를 무너뜨릴 수도 있고, 반대로 다시 태어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실수와 즉흥, 통제 불가능성과 라이브의 잔혹함이 가득한 공간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영화 세트보다도 더 진실한 검증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 무대는 배경이 아니라 법정입니다. 리건은 그 위에서 연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인지, 정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끝없이 판결받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연속성

 

 또 하나, 이 영화를 보며 강하게 느꼈던 불편한 지점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이 이른바 ‘원테이크’처럼 보이는 방식일 텐데, 저는 이 형식이 단순히 대단한 기술로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그 형식을 통해 주인공 리건의 감정을 끊김 없이 밀어붙이고, 관객이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거의 직접 경험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리건이 느끼는 욕구와 반성, 불안과 자기연민, 자의식과 초조함이 쉬지 않고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장면에서는 우스꽝스럽다가도, 곧바로 처절해지고, 또 어떤 순간에는 우스울 정도로 과장된 방식으로 무너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감정이 한 번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긴 호흡 안에서 계속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관객 역시 리건의 상태를 이해한다기보다, 그 감정의 흐름 안으로 끌려 들어가게 됩니다.

 

 

 저는 이 지점이 이 영화를 더 불편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편집으로 숨을 돌리게 해주거나, 장면이 바뀌며 감정을 정리할 틈을 주는 대신, 이 영화는 계속해서 리건의 불안을 연장합니다. 우리의 삶이 컷으로 나뉘지 않듯이, 어떤 감정은 끝났다고 생각해도 다시 이어지고, 정리됐다고 믿어도 전혀 다른 형태로 되돌아오곤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연속성은 단순한 시각적 쾌감이 아니라, 끊을 수 없는 의식과 도망칠 수 없는 자기 인식을 형식으로 바꿔놓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이런 방식이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형식이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낸다고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어떤 면에서는 자기몰입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그 과잉마저도 이 영화의 일부처럼 느껴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리건을 차분히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불안과 초조, 그리고 무너질 듯 이어지는 감정의 흐름을 관객에게 그대로 건네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영화의 카메라는 리건을 단순히 찍는 것이 아니라, 리건의 불안을 끊지 않고 끝까지 연장하는 장치처럼 보였습니다.

 

리건을 찢는 세 개의 잣대

 

 혼란스러운 삶 속에는 늘 어떤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시선들은 생각보다 훨씬 쉽게 우리를 흔듭니다. 내가 한때 자랑스럽게 여겼던 에고가 어느 순간 나를 괴롭히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기만의 기준을 너무나도 강하게 밀어붙인 나머지 타인을 상처 입히고 파괴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결국 우리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단순한 실패나 좌절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를 평가하고 규정하려 드는 시선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버드맨, 마이크, 타비사는 단순히 리건을 방해하는 적대자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리건을 심판하는 세 개의 판단 체계처럼 보입니다. 먼저 버드맨은 대중성과 상업성의 목소리입니다. 사람들은 결국 거대한 것, 더 잘 팔리는 것, 더 익숙하고 소비하기 쉬운 것을 원한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존재. 한때 리건 자신이 가장 찬란하게 누렸던 성공의 얼굴이기도 하기에, 버드맨은 더 잔인합니다. 바깥에서 날아오는 조롱이라기보다는, 자기 안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욕망과 유혹의 목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마이크 샤이너는 또 다른 종류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그는 예술의 순수성을 누구보다 강하게 믿고, ‘진짜’라는 것을 절대적인 기준처럼 밀어붙입니다. 문제는 그 진짜라는 기준이 너무 강한 나머지, 결국 타인을 압박하고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마이크는 리건이 두려워하는 것을 가장 정확히 찌르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네가 하는 것은 진짜가 아니다, 너는 여기 속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 그래서 그는 단순히 불쾌한 인물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타인을 끝없이 시험대에 올리는 잔인한 순수성의 얼굴처럼 느껴집니다.

 

 

 타비사 디킨슨은 조금 더 냉정하고 제도적인 방식으로 리건을 압박합니다. 그녀는 단순한 악역이라기보다, 누가 무대 위에 설 자격이 있는가를 판정하는 권력의 얼굴에 더 가깝습니다. 배우 개인을 싫어하는 차원을 넘어서, 애초에 리건 같은 인물이 브로드웨이에 들어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그렇기에 타비사는 비평가 개인이라기보다, 예술의 세계가 얼마나 배타적이고 위계적인가를 보여주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런 그녀 역시 결국 주목과 충격, 극적인 사건 앞에서는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순간 영화는 비평 또한 결코 순수하거나 초월적인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보여주는 갈등은 단순히 예술 대 상업의 대립이 아닌 것 같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가 ‘진짜’라고 말할 권리를 가지는가를 둘러싼 싸움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싸움 한가운데에 놓인 리건은, 서로 다른 기준들이 동시에 자신을 찢어발기는 상황 속에서 끝없이 흔들립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무엇으로 버텨야 할까요. 저 역시 결국에는 자신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정직하게 보여줍니다. 삶은 단순하지 않고, 사람은 하나의 기준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모든 것에는 너무 많은 욕망과 시선과 판단이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버드맨>은 결국, 한 인물이 무너지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런 복잡한 얽힘 속에서도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붙들려는 몸부림처럼 느껴졌습니다.

 

영화의 심장

 

 이 영화에서 레이먼드 카버는 단순히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끌어온 이름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작품들은 문학을 가져오면서 그것을 일종의 권위처럼 사용하기도 하지만, <버드맨>에서 카버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자리에 놓여 있습니다. 리건이 왜 하필 카버를 붙드는지를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단순히 있어 보이고 싶은 욕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절박함이 느껴집니다. 그는 카버를 통해 자기 연극을 더 그럴듯하게 만들고 싶은 것이 아니라, 어쩌면 자기 삶 또한 조금은 더 진실한 문장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이쯤에서 자연스럽게 떠오르게 됩니다. 리건이 정말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영화는 겉으로 보기에는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는 감정의 롤러코스터처럼 보입니다. 리건의 삶을 괴롭히는 잣대들, 그를 흔드는 인물들, 예술과 상업, 자의식과 인정욕구가 뒤엉킨 채 쉼 없이 밀려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지나고 나서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작품은 처음부터 이미 답을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이 삶에서 원하는 것을 얻었나요?”라는 질문, 그리고 “내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느끼는 것”이라는 대답. 저는 이 문장이야말로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고백처럼 느껴졌습니다. 리건이 진짜 원했던 것은 단순한 성공이나 유명세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어쩌면 가장 본질적인 욕구, 즉 내가 아직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내가 완전히 지워진 존재는 아닌지, 나라는 사람이 아직 누군가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확인받고 싶은 마음에 더 가까웠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욕구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성립시키는 심장 같은 것이라고 느껴집니다. 어쩌면 이것이 없었다면, 이 영화가 이토록 처절하게 움직일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면 이 영화의 소란과 과장, 불안과 허세, 인정욕과 자의식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그것들은 단순히 우스꽝스러운 한 배우의 몸부림이 아니라, 결국 사랑받고 싶고 존재하고 싶고 진실해지고 싶어 하는 한 인간의 절박함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며 더더욱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안쓰럽고, 우습고, 처절하고, 때로는 잔인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모든 감정들이 결국 하나의 본능적인 욕구에서 뻗어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리건이 카버를 붙드는 이유는 문학적 권위를 빌리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기 삶도 아직 진실해질 수 있다고 믿고 싶어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버드맨>은 화려한 형식과 블랙 코미디를 넘어, 아주 깊고 쓸쓸한 감정의 자리까지 들어가는 영화가 됩니다.

 

가족, 너무 차갑지는 않게

 

 이 영화를 예술과 상업, 자의식과 인정욕구의 충돌로만 읽는다면 어딘가 중요한 한 조각을 놓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버드맨>이 끝내 차갑게만 남지 않는 이유는, 결국 이 영화가 리건을 하나의 예술가나 배우로만 다루지 않고,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전 남편이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실제 상처를 남긴 인간으로도 끝까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샘과 가족의 존재는 단순히 인간적인 온기를 더해주는 장치가 아니라, 리건이라는 인물을 다시 현실로 끌어내리는 아주 중요한 축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샘은 단순히 아버지에게 냉소적인 딸로 보기에는 너무 중요한 인물입니다. 그녀의 말은 날카롭고, 때로는 잔인할 정도로 정확합니다. 그리고 그 독설은 단순히 상처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리건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정면으로 건드린다는 점에서 더 아프게 다가옵니다. “당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단순한 비난이 아니라,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공포를 건드리는 문장처럼 느껴집니다. 리건이 진짜 두려워하는 것은 실패가 아니라 소멸일지도 모릅니다. 성공하지 못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 상태, 아무도 더는 신경 쓰지 않는 상태, 자신이 완전히 지워진 것 같은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리건의 상처만을 앞세워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 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리건은 분명 고통받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가족에게 상처를 남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공허함과 인정욕구, 무너진 자존감이 이해된다고 해서 그것이 곧 면죄부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좋은 것은, 예술가의 불안이나 고통을 낭만적으로 미화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샘과 전처 같은 인물들을 통해, 리건이 무대 밖에서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의 삶이 타인에게 어떤 흔적을 남겼는지를 잊지 않게 만듭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족이라는 것은, 가장 가깝기 때문에 가장 아픈 곳을 너무도 쉽게 건드릴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잊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가장 깊이 들여다봐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런 사람들이 우리 곁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바닥까지 떨어지더라도 아주 완전히 끝나버리지는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샘은 리건에게 가장 잔인한 평론가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그를 가장 현실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가족은 리건이 잃어버린 것들을 상기시키는 존재이면서도, 아직 완전히 닫혀버리지는 않은 관계의 가능성을 함께 품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파트를 떠올릴수록, <버드맨>이 결국 한 남자의 허영과 몰락만을 보여주는 영화는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오히려 이 영화는, 무대 위에서 끝없이 증명하려 하는 사람도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또 누군가에게 다시 받아들여지고 싶어 하는 아주 인간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끝내 놓치지 않으려는 영화처럼 보입니다.

 

굳이 해결하거나, 해석해야만 하는 걸까?

 

 <버드맨>의 엔딩을 이야기할 때 가장 쉽게 빠지는 것은, 결국 리건이 정말 날았는지 아닌지를 두고 답을 내리려는 태도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해석은 흥미롭습니다. 현실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 죽음이었는지, 해방이었는지. 하지만 이 영화의 마지막을 단순히 하나의 정답으로 고정해버리면, 오히려 이 영화가 끝까지 붙잡고 있던 감정의 결을 놓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 엔딩은 현실과 환상 중 하나를 고르라고 내미는 장면이라기보다, 그 둘이 끝내 분리되지 않는 상태 자체를 보여주는 장면에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계속해서 추락과 비상, 처절함과 우스꽝스러움, 몰락과 구원을 한데 겹쳐놓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 역시 어느 한쪽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습니다. 리건에게 해방은 늘 추락처럼 보이고, 추락은 또 이상할 만큼 해방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실패와 성공을 나누는 문제도 아니고, 현실과 환상을 판별하는 문제도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끝까지 견디지 못한 끝에 맞이하는 어떤 상태, 그리고 동시에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비로소 벗어나는 것 같은 이상한 감각이 함께 놓여 있는 순간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결말을 보면서, “정말 날았을까?”보다는 “왜 리건에게는 그런 순간이 필요했을까?”를 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끝없이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하던 사람이 마지막에 도달한 자리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진짜 자유였을 수도 있고, 끝내 감당하지 못한 자기 파괴였을 수도 있으며, 혹은 그 둘이 동시에 겹쳐 있는 상태였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라, 이 영화가 왜 마지막까지도 그 둘을 나누지 않으려 하는가를 느끼는 일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버드맨>의 엔딩은 해답이라기보다 여운으로 남습니다. 깔끔하게 설명되지 않기 때문에 더 오래 남고, 끝내 정리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영화 전체를 다시 돌아보게 만듭니다. 리건은 마지막 순간에 추락한 것인지, 비상한 것인지, 혹은 그 둘 모두였는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끝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단순한 반전이나 정답이 아니라, 한 인간에게 해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자주 추락의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가 하는 사실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버드맨>의 결말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오래도록 남아 있는 상태로 기억되는 것 같습니다.

 

예기치 못한 무지의 미덕

 

 <버드맨>은 분명 많은 찬사를 받은 작품입니다. 형식적인 대담함, 배우들의 연기, 불안정한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연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나의 호흡처럼 묶어내는 힘까지.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누군가에게는 지나치게 과시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자기 안의 허영을 비판하는 척하면서도 결국 그 허영 자체를 다시 한 번 화려하게 전시하는 작품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향한 반응이 선명하게 갈리는 것도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지점이야말로 <버드맨>이 오래 남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예술과 상업, 진심과 허영, 비상과 추락, 인정욕과 자기혐오를 깔끔하게 정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들이 한 사람 안에서 동시에 뒤엉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때로는 잔인할 만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어떤 명쾌한 결론으로 수렴되기보다, 끝내 정리되지 않는 감정으로 남게 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버드맨>은 완전히 편안한 걸작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쉽게 사랑할 수 있는 영화도 아니고, 다 보고 나서 깔끔하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는 영화도 아닙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자주 떠오르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삶 속에서 허영과 진심,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마음, 추락과 해방을 그렇게 명확히 나누며 살아가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또한,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것을 이 작품은 함께 말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삶은 언제나 해결해야 할 문제나 끝내야 할 일들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어떤 순간에는 끝내 해결하지 못한 채 그대로 두어야 하는 일도 있고, 어떤 감정은 끝까지 알지 못한 채 바라볼 수밖에 없는 때도 있습니다. 설명되지 않는 상태 그대로를 견뎌야 하는 순간, 정리되지 않는 마음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도 분명 존재합니다. 어쩌면 <버드맨>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바로 그런 종류의 감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버드맨>은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말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자의식과 불안,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사라지고 싶지 않은 마음을 끝내 분리하지 못한 채 흔들리는 영화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흔들림 때문에, 이 영화는 하나의 해석으로 닫히기보다 오래 남아 우리 안에서 계속 여운처럼 번져가는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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