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The Odyssey

workingtitle 2026. 9. 4. 20:07

 

 너무나 보고 싶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를 감상했습니다. 솔직히 이 영화를 기다렸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비슷한 궁금증을 품었을 것 같습니다. 현실감을 극한까지 추구하는 놀란 감독이 그려낸 ‘신화’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트로이의 목마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전쟁이라는 거대한 현상을 어떻게 스크린 안에 담아냈을까. 제우스의 분노와 포세이돈의 바다, 신과 괴물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오펜하이머〉를 만들 때도 놀란이 실제 핵폭탄을 터뜨려 촬영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죠. 물론 정말 핵폭탄을 터뜨렸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 농담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닐 겁니다. 그만큼 그는 관객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머리로 이해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장면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감독이니까요. 저 역시 그가 오디세우스의 모험을 얼마나 거대하고 현실적인 이미지로 구현했을지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스크린에 펼쳐진 〈오디세이〉는 ‘현실감 있게 만들어진 신화’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했습니다. 지혜로운 영웅으로 전해진 오디세우스는 그 영웅이라는 이름 뒤에서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전쟁의 승리와 환호가 모두 지나간 뒤, 그 승리를 만들어낸 사람의 마음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신과 괴물들은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가로막는 장애물에 불과했을까. 아니면 그가 끝내 외면할 수 없었던 자기 자신을 다른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었을까.

 

 오랜 세월 하나의 영웅담으로 전해진 이야기를 현대의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감정과 질문으로 다시 풀어낸 이 영화에는 정말 곱씹어볼 부분이 많았습니다. 트로이의 전쟁과 폴리페모스의 동굴, 키르케의 집과 망자들의 해변, 세이렌의 바다와 이타카의 왕궁까지. 긴 러닝타임 동안 수많은 장면이 펼쳐지는데도 허투루 지나가는 부분이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의 모험이 끝날 때마다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의 다른 면이 드러났고, 그 모든 여정이 끝난 뒤에는 처음 알고 있던 영웅과는 전혀 다른 얼굴이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는 무엇이 달랐을까요. 그는 이 오래된 신화에서 무엇을 다시 꺼내고 싶었던 것일까요.

 

신화를 현실에 세우는 방법

 

 

 영화를 보기 전 가장 먼저 기대했던 것은 역시 화면이었습니다. 놀란이 아이맥스 카메라로 트로이 전쟁을 찍고, 실제 크기의 함선을 바다에 띄우고, 거대한 트로이 목마와 폴리페모스를 직접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이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실제로 펼쳐진 화면은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에서 바다는 배경처럼 가만히 놓여 있지 않습니다. 배를 밀어주다가도 금세 뒤집어 삼킬 듯이 움직이고, 인물들이 아무리 계획을 세워도 그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파도가 배 옆면을 때릴 때마다 나무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리고, 노가 바위에 부딪혀 부러질 때는 그 충격이 화면 바깥까지 튀어나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인간이 바다를 건넌다기보다 바다가 잠시 인간의 통과를 허락해주고 있다는 느낌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요.

 

 

 아이맥스의 커다란 화면은 이런 관계를 더 극단적으로 보여줍니다. 절벽 위에서 검을 휘두르는 텔레마코스의 몸은 광대한 풍경 안에서 아직 너무 작고, 그가 처음 바다로 향할 때 화면 대부분을 채운 물결은 아버지의 자취를 찾아가는 길이 얼마나 막막한지를 먼저 보여줍니다. 화면이 커질수록 영웅이 더 커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지나가야 할 세계가 얼마나 거대한지가 보이는 것이죠.

 

 폴리페모스와 라이스트뤼고네스, 키르케의 주술 역시 매끈한 환상처럼 떠 있지 않습니다. 거인의 피부와 관절, 동굴 벽에 걸리는 몸의 무게가 느껴지고, 사람이 돼지로 변하는 순간에도 몸이 실제로 뒤틀리고 바뀌는 감각이 먼저 들어옵니다. 실물 촬영에 대한 고집은 “우리는 이것을 정말 만들었다”는 자랑처럼 튀어나오기보다, 관객이 그 장소와 생명체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게 하는 쪽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놀란이 신화를 현실적으로 만들었다는 말의 의미도 조금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그는 신화를 현실의 크기로 줄이지 않았습니다. 거인은 여전히 거인이고, 사람은 돼지가 되며, 바다는 신의 분노처럼 배를 집어삼킵니다. 다만 그 모든 것에 실제 무게와 표면, 저항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신화의 크기는 그대로인데 그 안에 들어간 인간의 몸만 너무 작고 약하게 느껴집니다. 오디세우스가 견뎌야 했던 세계의 크기를 관객도 함께 체감하게 된 것이죠.

 

목마의 바깥에서 안쪽으로

 

 그 차이는 트로이 목마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마는 대개 멀리서 바라보는 이미지입니다. 거대한 나무 말과 그것을 성 안으로 옮기는 사람들, 그리고 밤이 되자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 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기발한 계략이니, 아무래도 목마의 위용과 작전의 성공에 먼저 시선이 갈 수밖에 없겠죠.

 

 

 그런데 놀란의 카메라는 목마를 바깥에서 감상하는 데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이내 그 배 속으로 들어가 병사들과 함께 갇힙니다. 그곳은 영웅들이 멋지게 숨어 있는 비밀 병기가 아닙니다. 몸을 제대로 펼 수도 없고, 며칠 동안 배설물조차 처리할 수 없으며, 서로의 숨과 땀을 그대로 견뎌야 하는 나무 감옥에 가깝습니다.

 

 목마가 바닷물에 잠기자 아래쪽에 있던 병사들은 작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죽어갑니다. 위에 있는 사람들이 관을 내려 겨우 숨을 나눠주지만 모두를 살릴 수는 없습니다. 마침내 목마가 성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열렸을 때도 병사들은 곧바로 영웅처럼 뛰어나오지 못합니다. 너무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한 탓에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립니다.

 

 

 전설에서는 한두 문장으로 지나갈 수 있는 계략이겠죠. 하지만 영화는 그 한 문장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냄새와 소리, 공포를 견뎌야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목마의 기발함에 감탄하기 전에, 그 기발한 생각을 실행하려면 누군가가 저 안에 들어가야 했다는 사실부터 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화는 신화의 유명한 이미지에서 출발하지만 자꾸만 그 안쪽의 숨겨진 이야기들부터 파고들어갑니다. 영웅담이 바깥에서 보았던 모양이라면, 놀란이 궁금했던 것은 그 이야기를 실제로 겪은 사람의 몸이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그 몸이 견뎠던 고통은 시간이 흐르면서 영웅의 노래에서 빠져나갑니다. 목마는 천재적인 계략으로 남지만, 그 안에서 물에 잠겨 죽은 병사들의 이름은 남지 않습니다.

 

영웅보다 먼저 들려주는 노래

 

 영화는 오디세우스의 얼굴이 아니라 그에 관한 노래로 시작합니다. 이타카의 연회장에 선 음유시인은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리며 트로이의 성벽을 무너뜨린 영웅의 계략을 노래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이미 고향에 도착해 있습니다. 여담이지만, 트래비스 스캇이 연기한 이 음유시인의 몇 단어들은 생각보다 몸을 흔들어주는 리듬감이 느껴집니다 ㅎㅎ

 

 이 시작이 참 재미있죠. 보통 영웅담이라면 주인공이 위대한 일을 해내고 마지막에 그 업적이 노래가 되어 전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순서를 거꾸로 놓습니다. 먼저 영광스러운 노래를 들려주고, 그 노래 속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한참 뒤에 보여줍니다. 전설이 먼저 도착하고 진실이 그 뒤를 따라오는 것이죠. 사람들은 오디세우스를 트로이 전쟁을 끝낸 지략가로 기억하지만, 정작 그에게 그 이야기는 가장 견디기 힘든 기억입니다.

 

 

 페넬로페가 음유시인의 노래를 중단시키는 것도 그래서 의미가 달라 보였습니다. 그녀가 기다린 것은 전설 속 영웅이 아니었으니까요. 트로이의 성벽을 무너뜨린 계략도, 수많은 괴물을 물리친 무용담도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기다린 사람은 함께 갓난아이를 바라보던 남편이었고,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한 채 금빛 브로치를 받아 들었던 오디세우스였습니다.

 

 텔레마코스에게는 그 간극이 더욱 큽니다. 아버지가 전쟁터로 떠날 때 그는 갓난아이였으니 얼굴과 목소리, 함께 보낸 기억이 없습니다. 안티노오스는 자신이 어린 시절 오디세우스와 사냥을 다녔다며 친아들보다 그를 더 잘 아는 듯이 말하고, 메넬라오스는 트로이 목마를 만든 영웅을 들려줍니다. 텔레마코스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들을 모으며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버지를 상상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화의 비선형 구조도 시간을 복잡하게 섞기 위한 장치로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한쪽에서는 텔레마코스가 다른 사람의 기억을 통해 아버지를 찾아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기억을 잃은 오디세우스가 칼립소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되짚습니다. 아들은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를 만들고, 아버지는 기억 속에서 자기 자신을 다시 만들어갑니다. 결국 이 영화가 찾아가는 것은 오디세우스의 행방만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는 ‘오디세이’라는 이야기 안에서 정작 오디세우스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었는가 하는 질문에 가까워 보입니다.

 

승리를 만든 거짓말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끝낸 사람입니다. 십 년 동안 무너지지 않던 성벽을 힘이 아닌 생각으로 열었습니다. 거대한 나무 말을 아테나에게 바치는 화평의 제물로 속여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밤이 되자 그 안에 숨어 있던 병사들이 나와 성문을 엽니다. 오디세우스가 지혜로운 영웅으로 기억되는 가장 큰 이유이지만, 놀란은 그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는지를 자랑하기보다 그 생각을 실행하기 위해 누가 속고 죽어야 했는지를 바라봅니다.

 

 

 그 중심에 시논이 있습니다. 시논은 징집 추첨에서 면제 표를 뽑아 원래라면 전쟁에 나가지 않아도 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두려워한 안티노오스가 자신의 징집표와 몰래 바꿔치기하고, 오디세우스는 그 장면을 보고도 바로잡지 않습니다. 안티노오스 집안과의 관계와 전쟁에 필요한 병력 사이에서 시논을 데려가는 쪽을 택한 것이죠. 안티노오스가 시작한 거짓말을 오디세우스가 완성한 셈입니다.

 

 트로이 목마 작전에서도 시논은 다시 거짓말의 한복판에 놓입니다. 그는 그리스군에게 버림받은 병사인 척하며 목마가 아테나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트로이 사람들을 설득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논조차 목마 안에 동료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가 진심으로 자기 말을 믿어야 적들도 속을 것이라는 오디세우스의 판단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논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거짓말을 진실로 믿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그 말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의 지략과 그 지략에 사용된 사람의 희생이 한 작전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것이죠.

 

 

 트로이 사람들이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인 이유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적이 남겨놓은 수상한 물건이었지만, 자신들도 섬기는 아테나에게 바친 제물이라고 믿었습니다. 서로 전쟁을 벌이고 있어도 신에게 바친 제물과 손님을 대하는 법만큼은 지켜질 것이라는 마지막 신뢰가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의 계략은 바로 그 믿음을 이용합니다. 밤이 되자 목마의 배가 열리고, 십 년 동안 쌓인 분노가 하룻밤 사이에 트로이로 쏟아집니다. 무기를 든 병사들만이 아니라 민간인과 아이들까지 사냥당하고, 집과 신전이 불타며, 그리스인과 트로이인이 함께 숭배하던 아테나의 신상마저 파괴됩니다.

 

 오디세우스가 무너지는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자신이 모든 집에 불을 지른 것도 아니고 민간인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도 아니지만, 자신이 만든 목마가 없었다면 그 밤의 학살 역시 시작되지 않았겠죠. 어디까지가 자신의 책임이고 어디서부터 다른 병사들의 선택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트로이의 신전에서 죽어가는 여사제의 얼굴이 아테나와 겹치는 장면도 그 혼란을 한 이미지로 보여줍니다. 실제 여신이 그 얼굴을 빌려 나타난 것인지,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죄책감에 여신의 모습을 입힌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날 이후 그가 아테나를 볼 때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한 사람의 얼굴도 함께 보고 있었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오펜하이머〉가 떠오릅니다. 한 사람은 원자폭탄을 만들었고, 다른 한 사람은 트로이 목마를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지성을 이용해 전쟁을 끝내고 영웅이 되지만, 자신이 만든 것이 세상에 풀려난 뒤에는 그 결과를 통제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오디세우스를 현대의 법정에 세워놓고 유죄를 선고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 목마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한 최선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문제는 최선이라고 믿었던 선택도 끔찍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겠죠. 트로이에서 오디세우스가 잃은 것은 부하들만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세상은 인간보다 크다

 

 트로이를 떠난 뒤 오디세우스는 아가멤논의 함대를 따라가지 않고 다른 항로를 선택합니다. 더 빠르게 집에 도착할 수 있고 가는 길에 필요한 식량도 구할 수 있다는 판단이었지만, 그 선택에서부터 여정은 계속 어긋납니다. 폴리페모스의 동굴에서도 그는 처음에는 누구보다 침착합니다. 잠든 거인을 죽이면 입구를 막은 돌을 옮길 사람이 없어 모두 갇힌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기다렸다가 눈을 찌른 뒤 양털과 지푸라기로 손의 감각을 속여 빠져나갑니다.

 

 

 그런데 안전하게 탈출한 직후 폴리페모스가 잡아먹은 부하의 투구를 뱉어내자 그의 태도가 달라집니다. 부하들이 만류하는데도 돌아서서 화살을 쏘고, 분노한 거인이 바다까지 쫓아오는 바람에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한 병사들이 추가로 죽습니다. 그렇게 영리한 사람이 왜 굳이 일을 키운 것일까요. 죽은 부하를 향한 분노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는 그가 폴리페모스에게서 자기 자신과 닮은 모습을 보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손님을 죽이고 힘없는 사람을 사냥하며 인간 사이의 규율을 파괴한 괴물. 트로이에서 오디세우스가 보고도 막지 못했던 모습과 어딘가 닮아 있죠.

 

 오디세우스가 출정 전 사냥감에게도 활시위를 튕겨 자기 존재를 알렸던 사람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 행동은 더 복잡해집니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자신을 숨기지 않고 공정하게 싸우는 것이 명예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트로이에서는 거대한 속임수로 승리를 얻었습니다. 폴리페모스를 향해 쏜 화살은 죽은 부하를 위한 분노인 동시에, 저 괴물과 자신은 다르다고 증명하고 싶은 몸부림이 아니었을까요.

 

 

 영화가 원전의 유명한 ‘아무도 아니다’라는 계략을 덜어낸 것도 폴리페모스의 성격을 바꿉니다. 이 영화의 거인은 인간에게 먼저 말을 걸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나가는 개미에게 자기 뜻을 설명하지 않듯, 그에게 인간은 대화할 가치조차 없는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가 처음 인간의 언어를 꺼내는 순간은 눈이 찔린 뒤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저주를 부탁할 때입니다. 그제야 오디세우스 일행은 자신들이 상대하던 존재가 어디에 속해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라이스트뤼고네스의 섬에서도 인간의 지략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가 나타납니다. 생김새와 행동은 아이인데 체구는 성인 남자와 비슷한 존재를 따라갔다가, 갑옷을 입은 성인 거인들에게 포위당합니다. 병사들의 검과 창은 그 갑옷에 제대로 흔적조차 남기지 못하고, 거인들은 배를 통째로 들어 올리고 흔들어 부숩니다. 오디세우스는 지략으로 트로이의 성벽을 무너뜨린 사람이지만, 이 여정에는 인간의 생각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바다와 폭풍, 거인과 운명 앞에서 그의 지략은 사람을 구하기도 하지만 더 큰 위험을 불러오기도 합니다.

 

인간의 모습을 한 짐승들

 

 키르케의 집에서는 인간과 괴물의 경계가 또 다른 방식으로 무너집니다. 집으로 향하는 길에는 사자와 표범 같은 맹수들이 놓여 있지만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만 합니다. 병사들이 돼지로 변하는 모습을 보고 나면 그 맹수들 역시 원래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죠.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을 돼지로 바꾸면서 자신이 그들을 짐승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모습을 드러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트로이의 성문이 열린 뒤 병사들이 사람을 사냥하던 모습을 생각하면 그 말을 가볍게 흘려듣기 어렵습니다.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부터 이미 짐승처럼 행동했다는 뜻일 테니까요. 동시에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이 그녀의 집에서 당장 약탈이나 살인을 저지른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키르케가 이전에 군인들에게 당한 일을 눈앞의 모든 병사에게 겹쳐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라고 항변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누군가의 약점을 이용합니다. 키르케의 새장 안에 갇힌 까마귀가 그녀에게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인질로 삼는 것이죠. 이번에도 사람을 구한 것은 그의 관찰력과 판단이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트로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상대가 무엇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지 알아낸 뒤 그 약점을 이용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습니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쉽게 나누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영리한 속임수로 부하들을 구하고, 사람을 돼지로 만든 키르케를 죽이려는 부하들까지 말립니다. 그러나 그가 누군가를 구할 때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선택권이 사라집니다. 시논이 그랬고 키르케 역시 그렇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지략과 타인을 이용하는 지략이 같은 머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키르케는 앞으로 오디세우스를 제외한 모든 부하가 죽고, 그 혼자만 이타카로 돌아갈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러자 그는 신들이 그렇게 정했다면 자신이 신들과 맞서 부하들을 살리겠다고 답합니다. 분명 멋있는 말이죠. 부하들을 포기하지 않는 지도자의 의지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운명까지 전부 책임질 수 있을까요. 부하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과, 자신이라면 신이 정한 운명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은 어디에서 갈라지는 것일까요. 그 답을 얻기 위해 오디세우스는 죽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으러 갑니다.

 

죽은 자들 앞에 선 영웅

 

 오디세우스와 부하들은 불과 얼음이 만나는 망자들의 해변으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피를 바치자 땅속에 묻혀 있던 죽은 자들이 하나씩 몸을 일으킵니다. 영웅의 노래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든 이야기라면, 저승은 그 노래에서 빠져나간 사람들이 다시 입을 여는 장소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오디세우스가 가장 먼저 마주하는 사람은 유명한 영웅이 아니라 시논입니다.

 

 

 시논은 왜 자신에게까지 목마의 진실을 숨겼느냐고 묻습니다. 자신이 정말로 아테나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믿어야 트로이 사람들도 속을 수 있었다는 오디세우스의 대답은 전략적으로 옳습니다. 하지만 시논에게는 그 옳은 전략 때문에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이 전부겠죠. 더구나 안티노오스가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그의 아버지는 이타카에서 굶어 죽었습니다. 시논은 전쟁터에서만 희생된 것이 아니라, 전쟁에 끌려간 순간부터 가족과 삶 전체를 빼앗겼습니다.

 

 시논은 오디세우스에게 안티노오스를 벌하고 서쪽의 땅으로 가서 제대로 묻히지 못한 병사들의 넋을 기려달라고 부탁합니다. 그가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가족을 만나기 위해서만은 아니게 되는 순간입니다. 살아 있는 자신이 죽은 사람들에게 해야 할 일을 끝내기 위해서라도 이타카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가멤논의 등장은 또 다른 의미에서 강렬했습니다. 그는 한 명의 인간이라기보다 왕과 전쟁, 문명 자체가 갑옷을 입고 걸어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망자가 된 뒤에도 그 위압감이 사라지지 않지만, 그 왕중왕도 고향으로 돌아간 뒤 아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친 선택이 결국 자기 집 안에서 돌아온 것이죠. 아가멤논은 오디세우스에게 개선장군처럼 정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정체를 숨긴 채 무엇이 달라졌는지 먼저 살펴보라고 충고합니다. 그의 죽음은 전쟁에서 승리한 영웅도 이전의 남편과 아버지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줍니다.

 

 오디세우스가 저승을 떠날 때는 제대로 묻히지 못한 병사들의 망령이 해변을 가득 메웁니다. 그들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불명예도 함께 가져가라고 외치고, 오디세우스는 배가 멀어지는 동안 그들을 끝까지 바라봅니다. 세상은 오디세우스 한 사람의 모험을 기억하겠지만, 실제 오디세우스의 기억에는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붙어 있습니다. 그 얼굴들을 모두 안고도 계속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것. 어쩌면 이 영화에서 귀향이 그토록 오래 걸리는 가장 큰 이유도 거기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키지 못한 약속들이 부르는 노래

 

 이 영화에서 제가 가장 오래 붙잡고 생각하게 된 장면은 세이렌이 등장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으면 누구도 그 유혹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고, 자신은 돛대에 묶은 채 그 노래를 듣겠다고 합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직접 경험하고 싶어 하는 호기심과 자신이라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함께 있는 선택이겠죠.

 

 그런데 노래가 시작된 뒤 그의 얼굴은 예상과 전혀 다릅니다. 황홀해하거나 아름다움에 취하지 않습니다. 몸을 뒤틀고 울면서 자신을 풀어달라고 소리칩니다. 무엇을 들었기에 저렇게 무너지는지 관객은 알 수 없습니다. 영화가 세이렌의 노래를 직접 들려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관객에게 들리는 것은 귀를 밀랍으로 막은 부하들이 듣는 것과 같은 먹먹한 소리뿐입니다. 노래의 선율도, 목소리도, 그 안에 담긴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오직 돛대에 묶인 오디세우스의 몸과 몰래 밀랍을 떼어낸 뒤 바다로 뛰어드는 한 병사의 모습만 보입니다. 표현할 수 없는 노래를 억지로 만들어 들려주는 대신, 그 노래를 들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죠.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도 모든 사람을 죽음으로 끌어당기는 세이렌의 노래를 완벽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영화는 그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소리를 비워둡니다. 그래서 오히려 관객은 저마다 오디세우스가 무엇을 들었을지를 상상하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 음악을 들려주지 않은 선택이 오히려 어떤 음악보다 강하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나중에 오디세우스는 그것이 자신이 어긴 약속들의 노래였다고 말합니다. 가장 갈망하는 것을 보여준 뒤 그것을 갈망한 사실을 후회하게 만드는 노래, 가장 원하는 것은 이미 가졌다가 잃어버린 것이며 이제는 다시 가질 수 없다고 깨닫게 하는 노래였습니다. 그가 가장 원했던 것은 이타카였겠죠.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 자신이 떠나온 집과 그곳에서 살던 자신의 모습 말입니다.

 

 하지만 오디세우스가 전쟁터로 떠날 때 갓난아이였던 텔레마코스는 이제 아버지의 얼굴조차 모르는 청년이 되었고, 페넬로페는 남편에게 받은 약속 하나를 붙든 채 이십 년을 견뎠습니다. 오디세우스 자신도 수많은 죽음을 보고 도시를 불태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세이렌이 보여준 이타카는 그가 돌아가고 싶은 집인 동시에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아니었을까요. 집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지만, 그 집에서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은 모두 달라졌습니다. 그가 그토록 갈망한 귀향 안에는 처음부터 상실도 함께 들어 있었습니다.

 

모두를 살릴 수는 없다는 것

 

 세이렌의 바다를 지난 뒤 오디세우스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카리브디스로 가면 모두가 죽고, 스킬라가 있는 길로 가면 여섯 명이 죽습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예언을 들은 그는 카리브디스의 소용돌이를 이용하자는 위험한 계획을 먼저 내놓습니다. 병사들이 그 계획에 반대해 스스로 다른 길을 택하도록 만들지만, 그곳에 스킬라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숨깁니다. 배가 좁은 물길에 들어서고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병사들은 안심하지만, 바로 그 순간 바위 사이에서 여섯 개의 머리가 튀어나와 여섯 사람을 낚아챕니다.

 

 

 오디세우스는 여섯 명과 전부 사이에서 여섯 명을 선택했습니다. 지도자로서 해야 했던 결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죽어간 여섯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선택되었다는 사실이 남습니다. 모두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를 죽게 할지 결정해야 했고,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부하들에게 진실을 숨겼습니다. 트로이 목마에서 시논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를 속여야 했습니다.

 

 태양신의 섬에서는 그마저도 통하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섬에 내리면 소를 절대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지만, 바람이 멈추고 식량이 떨어지자 병사들은 그가 잠든 사이 소를 죽여 먹습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그 선택조차 자신의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더 잘 이끌었다면, 더 나은 길을 찾았다면 저들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고 믿는 것이죠. 아테나는 그에게 그들이 스스로 실패한 것일 수도 있다고 말하며, 신들이 정한 운명과 부하들의 선택까지 왜 자신이 책임지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오디세우스의 위대함일 겁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실패를 자신의 책임으로 만들고, 자신만이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고 믿는다면 어떨까요. 그것 역시 자신을 신의 자리에 놓는 또 다른 오만일 수 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신들로부터 부하들을 구하겠다고 했지만, 예언자의 말처럼 그들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구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폭풍이 배를 두 동강 내고, 끝까지 모두를 데려가겠다고 약속한 지도자만 혼자 살아남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칼립소의 섬에서 오디세우스는 로토스를 먹으며 이름과 전쟁, 가족을 잊은 채 칠 년을 보냅니다. 자신이 죽게 한 사람도 없고, 지켜야 할 부하도 없으며, 돌아가야 할 집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억을 잃은 몸은 계속 해변의 나무 조각을 모아 뗏목을 만들려고 합니다. 머리는 이타카를 잊었는데 몸은 여전히 돌아가려 하는 것이죠. 칼립소가 금빛 브로치를 돌려주자 고향에 대한 그리움만이 아니라 트로이와 시논, 폴리페모스와 스킬라, 죽어간 부하들까지 한꺼번에 돌아옵니다. 집으로 가려면 자신이 잊고 싶었던 기억 역시 다시 받아들여야 합니다.

 

 

 칼립소는 이번만큼은 바다를 이기려 하지 말고 포세이돈의 벌에 몸을 맡기라고 합니다. 오디세우스는 조악한 뗏목을 타고 바다로 나가고, 파도가 그 뗏목을 부순 뒤에도 더 이상 물과 싸우지 않습니다. 영화 내내 운명과 신, 자연과 타인의 선택까지 통제하려 했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기 몸을 바다에 내려놓습니다. 모든 죄책감을 씻어냈기 때문은 아니겠죠. 다만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바로잡아야만 집에 갈 수 있다는 믿음에서는 조금 빠져나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타카로 돌아가는 마지막 길은 오디세우스가 만든 계획이 아니라,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바다가 그를 밀어 보내는 방식으로 완성됩니다.

 

돌아온 사람을 알아보는 법

 

 오디세우스는 마침내 어느 해변에서 눈을 뜹니다. 곁에 앉아 있던 아테나에게 이곳이 어디냐고 묻자, 그녀는 자신의 고향도 알아보지 못하느냐고 답합니다. 십 년 동안 그토록 돌아가려 했던 이타카에 도착했는데도 그는 그곳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지형이 달라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오디세우스가 알고 있던 고향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몸이 이타카에 닿았다고 해서 귀향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죠.

 

 

 그동안 이타카의 시간도 멈춰 있었습니다. 칼립소의 섬에서 오디세우스가 기억을 잃고 같은 시간을 반복하는 동안, 페넬로페는 낮에 시아버지의 수의를 짜고 밤이면 다시 풀었습니다. 하나는 과거를 잊어서 시간이 흐르지 않았고, 다른 하나는 기다림을 끝내지 않기 위해 시간을 되돌렸습니다. 텔레마코스 역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버지의 과거부터 찾아야 했습니다. 오디세우스가 돌아와야만 세 사람의 시간이 다시 움직일 수 있었지만, 정작 돌아온 그는 자기 이름부터 숨깁니다.

 

 

 처음 찾아간 에우마이오스에게도 자신이 돌아왔다고 말하지 못합니다. 눈이 멀고 두 아들과 개들을 잃은 에우마이오스가 오디세우스를 친아들처럼 사랑했다고 말하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시논이라고 소개합니다. 시논은 오디세우스의 거짓말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이름을 빌려서야 자기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참 묘합니다. 신전에서 텔레마코스를 구한 뒤에도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습니다.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버지가 바로 옆에서 “네 아버지는 살아 있으며 곧 돌아올 것”이라고 말하는 셈이죠.

 

 왕궁 입구에서 만난 아르고스만이 아무런 설명 없이 그를 알아봅니다. 이십 년 동안 주인을 기다린 늙은 개는 걸인의 옷과 수염, 피로 뒤덮인 얼굴에 속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가 가까이 오자 마지막 힘을 내어 꼬리를 조금 흔들고 숨을 거둡니다. 영화는 음악을 크게 부풀리거나 그 죽음을 감정적으로 길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과 아르고스가 처음 만났던 언덕에 묻어달라고 부탁하자, 그 말을 들은 텔레마코스가 비로소 걸인의 정체를 알아차립니다. 거대한 영웅담이 아니라 어린 강아지를 품에 안았던 한 사람의 기억이 아들에게 아버지를 알려준 것입니다.

 

 

 늙은 시녀 에우리클레이아는 발목의 흉터를 보고 그를 알아봅니다. 누군가는 냄새와 기척으로, 누군가는 오래된 기억으로, 누군가는 몸에 남은 상처로 오디세우스를 알아봅니다. 하지만 페넬로페에게는 그것만으로 부족합니다. 그녀는 걸인에게 남편이 어떤 장신구를 하고 있었는지 묻고, 오디세우스는 출정 전 그녀가 직접 건네준 금빛 브로치를 정확히 묘사합니다.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물건을 말하면서도 그는 여전히 시논의 이름 뒤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린 채, 자신이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를 털어놓습니다. 트로이 목마에서 나와 성문을 열었을 때 무엇을 보았는지, 십 년 동안 쌓인 분노가 하룻밤 사이에 도시를 집어삼키는 모습을 보며 무엇을 깨달았는지 말합니다. 그는 바다에서 길을 잃기 전에 이미 트로이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던 셈입니다. 페넬로페 역시 너무 오랫동안 폐허 속에서 살았다며 이제는 오디세우스가 돌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원한 것은 죄가 없는 영웅이나 이십 년 전과 똑같은 남편이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고백하고 그 기억을 품은 채 눈앞에 돌아와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귀향은 떠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 서로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그 상태에서 다시 상대를 알아보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닫힌 문

 

 다음 날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의 활에 시위를 걸고 열두 개의 도끼 사이로 화살을 통과시키는 사람을 새로운 남편으로 맞겠다고 선언합니다. 이 활은 영화 초반부터 오디세우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물건이었습니다. 그는 사냥감을 쏘기 전에 반드시 시위를 한 번 튕겨 자기 존재를 알렸습니다. 숨어서 일방적으로 죽이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트로이 목마라는 거대한 속임수로 전쟁을 끝낸 사람에게 활시위의 소리는 한때 자신이 믿었던 싸움의 방식이기도 했습니다.

 

 

 구혼자들은 활에 시위조차 걸지 못하지만, 걸인으로 위장한 오디세우스는 익숙한 손으로 시위를 건 뒤 예전처럼 한 번 튕깁니다. 현이 떨리면서 악기의 줄과 닮은 소리가 연회장에 퍼집니다. 얼굴도 왕관도 이름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평생 몸에 익혀온 하나의 동작과 소리가 오디세우스를 증명합니다. 화살은 열두 개의 도끼 사이를 통과하고, 활시위의 소리는 과거처럼 경고가 됩니다.

 

 이어지는 구혼자 학살은 통쾌한 귀환의 절정이면서 트로이의 밤을 떠올리게 합니다. 연회장의 문은 잠기고, 안에 있던 사람들은 무기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오디세우스의 공격을 받습니다. 밖으로 도망치려 해도 그동안 그들에게 모욕당했던 걸인들이 문을 막습니다. 트로이 사람들은 화평의 제물인 줄 알고 목마를 성 안으로 들였다가 안에서 나온 병사들에게 죽었고, 이타카의 구혼자들은 자신들이 괴롭히던 걸인을 왕궁 안에 들였다가 그 정체가 드러난 순간 빠져나갈 곳을 잃습니다. 두 사건은 서로 다른 장소에서 거의 같은 모양으로 반복됩니다.

 

 물론 완전히 같은 사건은 아닙니다. 트로이에서 오디세우스는 환대의 법을 믿었던 사람들을 속였고, 그 결과 무고한 사람들까지 학살당했습니다. 반대로 이타카의 구혼자들은 오랜 시간 손님으로 환대받으면서도 왕궁의 재산을 빼앗고, 주인의 아들을 죽이려 했으며, 자신들보다 약한 걸인과 하인들을 짓밟았습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한때 무너뜨린 법을 그 법을 악용해온 사람들을 처벌하며 다시 세웁니다.

 

 

 하지만 그 일을 수행하는 방식은 여전히 폭력입니다. 그의 몸에는 화살과 창이 박히고 연회장은 다시 피로 젖습니다. 트로이에서 빠져나온 오디세우스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깨끗한 방법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방식으로 싸우고, 그 싸움 끝에서 또 하나의 학살을 만들어냅니다. 제우스의 법을 다시 세우는 일과 자신이 저지른 폭력을 반복하는 일이 같은 장면 안에서 겹쳐 있는 것이죠.

 

 마지막까지 숨어 있던 안티노오스를 붙잡은 오디세우스는 시논의 징집표를 그의 입에 밀어 넣습니다. 안티노오스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바꿔치기했던 표, 시논을 트로이로 보내고 결국 죽게 만든 작은 나무 조각입니다. 오디세우스는 그를 죽이며 시논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만, 복수를 끝냈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던 왕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모두가 돌아온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순간, 오디세우스는 페넬로페의 품으로 쓰러집니다. 그가 되찾은 것은 왕좌였지만, 그가 정말로 원했던 것은 더 이상 그 자리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귀향 뒤의 항해

 

 페넬로페의 품에 안긴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죽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왕좌는 텔레마코스에게 넘어가고, 평생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다니던 아들은 이제 그 이야기의 뒤를 잇는 사람이 됩니다. 오디세우스는 되찾은 왕좌에 다시 앉지 않고 페넬로페와 함께 서쪽으로 향합니다. 죽은 전우들을 묻고 자신이 지키지 못한 약속을 마무리하기 위한 항해입니다. 그는 그것을 죽음이 아니라 유배라고 부릅니다.

 

 

 이 출항이 실제로 일어난 것인지, 페넬로페의 품에서 죽어가는 오디세우스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상상인지는 영화가 확실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처음 전쟁터로 떠나기 전 페넬로페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서쪽으로 도망치자고 말했지만, 당시의 오디세우스는 왕과 아버지로서의 의무 때문에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이십 년이 지난 뒤 두 사람은 그때 가지 못했던 서쪽으로 향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는 행복한 결말이라고만 부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곁에는 함께 떠났다가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의 기억이 있고, 오디세우스는 그들을 기리기 위해 서쪽으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페넬로페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항해이면서도 죽은 사람들에게 빚진 일을 끝내기 위한 길인 것이죠. 그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이전의 왕으로 복귀하는 대신, 자신이 지키지 못한 것들을 인정한 뒤 다시 떠납니다.

 

 

 배 위에서 오디세우스는 언젠가 자신들의 문명도 이야기와 노래로만 남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신들이 저지른 죄도 다시 잊힐 것이라고 말합니다. 노래는 사람을 기억하게 하지만 그 사람이 흘린 피와 두려움, 후회는 지워버릴 수도 있습니다. 트로이 목마는 천재적인 계략으로 남고, 그 안에서 죽은 병사와 성문이 열린 뒤 학살당한 사람들은 전설 밖으로 밀려납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영웅으로 기억될 것이라는 사실보다, 그 영웅담 때문에 다시 잊힐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영화는 서쪽으로 항해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불타는 트로이 목마와 그 앞에 서 있는 오디세우스를 보여줍니다. 영화를 보기 전 제가 가장 궁금했던 것도 바로 그 목마였습니다. 놀란은 저 거대한 나무 말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그것이 성 안으로 들어가고 트로이가 불타는 장면은 얼마나 압도적일까. 실제로 그 장면은 제가 기대한 만큼 거대했고, 아이맥스 화면 안에서 신화가 정말 눈앞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목마를 다시 떠올리면 이제는 크기보다 그 앞에 서 있던 오디세우스의 얼굴이 먼저 보입니다. 세상은 저 불타는 말을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으로 기억하겠죠. 정작 그 계략을 만든 사람은 그 불길 속에서 자신이 돌아갈 집까지 함께 타고 있는 것처럼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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