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Wicked

workingtitle 2026. 5. 9. 15:48

 

 현대적인 대형 뮤지컬을 이야기할 때, 〈위키드〉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화려한 색채, 거대한 무대, 귀에 강하게 남는 넘버,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익숙하게 접해온 〈오즈의 마법사〉의 세계관. 그 익숙한 배경이 무대 위에서 다시 펼쳐지는 순간, 이 작품은 관객에게 아주 빠르게 말합니다. “이것이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보여줄 수 있는 즐거움이다”라고.

 

 하지만 〈위키드〉의 매력은 단순히 화려함에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그 화려함을 이용해 관객을 먼저 끌어당긴 뒤, 그 안에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질문들을 숨겨둡니다. 한 사람은 왜 ‘사악한 마녀’가 되었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왜 ‘착한 마녀’로 불리게 되었을까. 그 이름은 정말 그 사람의 본질에서 나온 것일까, 아니면 그들을 바라본 세계가 만들어낸 역할이었을까.

 

 〈위키드〉는 넓게 보면 〈오즈의 마법사〉를 바탕으로 한 재해석의 작품입니다.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악역, 서쪽 마녀의 이야기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가 너무 쉽게 믿어버렸던 선과 악의 구도를 흔들어놓습니다. 검은 모자와 초록빛 피부, 빗자루와 날카로운 웃음으로 기억되던 인물에게 이름과 과거와 목소리를 부여하는 순간, 이 작품은 단순한 판타지가 아니라 꽤 정치적이고도 인간적인 이야기로 변합니다.

 

 그렇기에 〈위키드〉의 화려함에만 속아서는 안 됩니다. 이 작품 안에는 권력이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 대중이 누군가를 악인으로 소비하는 방식,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자기 자신으로 남고 싶은 마음 사이의 갈등, 그리고 끝내 같은 길을 가지 못한 두 사람의 우정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뮤지컬은 오랜 시간 브로드웨이에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볼거리가 많아서가 아니라, 보고 난 뒤에도 계속 질문이 남기 때문입니다.

 

 과연 엘파바는 처음부터 사악한 마녀였을까요.

 그리고 글린다는 정말 처음부터 착한 마녀였을까요.
 〈위키드〉는 이 익숙한 이름들을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마침표에서 다시 시작되는 이야기

 

 

 〈위키드〉는 신기하게도 한 인물의 기원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이 뮤지컬은 엘파바가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기 전에, 먼저 그녀의 죽음 이후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애도되지 않습니다. 군중은 그녀가 사라졌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환호하며, 마치 오래 기다렸던 결말을 맞이한 것처럼 노래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엘파바가 아직 자신의 입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자기 목소리보다 먼저 타인의 말 속에서 등장합니다. 누군가의 기억, 군중의 합창, 이미 굳어져버린 소문과 역사 속에서 그녀는 ‘사악한 마녀’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오프닝은 단순히 결말을 먼저 보여주는 장면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보다, 세상이 그 사람을 어떤 이름으로 기억하고 싶어 했는지를 먼저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이 구조는 우리가 정치적인 색채를 가진 작품들에서 자주 보아왔던 희생양의 이미지와도 닮아 있습니다. 권력은 언제나 누군가를 필요로 합니다. 모두가 불안할 때, 모두가 분노할 때, 모두가 복잡한 진실을 감당하기 어려울 때, 그 감정을 대신 떠안을 하나의 이름을 만들어냅니다. 엘파바 역시 처음부터 무대 위에 온전히 존재하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녀는 먼저 그렇게 불리게 된 인물입니다. 악해서 악녀가 된 것이 아니라, 악녀라고 불리는 방식 속에서 우리 앞에 나타납니다.

 

 그래서 〈No One Mourns the Wicked〉는 단순한 오프닝 넘버가 아닙니다. 이 넘버는 작품 전체의 시선을 결정합니다. 글린다는 빛나는 드레스와 높은 위치, 정돈된 목소리 안에서 등장하고, 군중은 그녀의 말을 통해 세계의 공식 입장을 받아들입니다. 반면 엘파바는 부재합니다. 무대에 없지만, 모두가 그녀에 대해 말합니다. 이 대비만으로도 작품은 이미 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누가 이야기를 말하는가. 누가 기억되는가. 그리고 누가 자기 이야기를 말하기도 전에 이미 악한 존재로 정리되어버리는가.

 

 

 결국 이 뮤지컬은 단순히 한 인물의 숨겨진 서사를 들려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군중은 어떤 방식으로 하나의 이야기를 믿게 되는지, 그리고 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시선과 욕망과 정치적 필요가 개입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화려한 판타지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그 시작은 생각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차갑습니다. 엘파바의 이야기는 그녀가 태어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녀가 이미 사라진 뒤 세상이 그녀를 어떻게 소비하고 있는지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이 오프닝은 작품의 전사처럼 느껴집니다. 앞으로 우리가 보게 될 것은 단순한 마녀의 해명이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떻게 ‘사악한 마녀’라는 이름 안에 갇히게 되었는지에 대한 긴 추적입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서 무대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믿어온 이야기 중에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빠진 채 완성된 이야기가 너무 많았을지도 모른다고.

 

익숙한 동화를 거꾸로 읽는다는 것

 

 〈위키드〉가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악역에게 사연을 붙였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이야기를 거꾸로 읽게 만듭니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서쪽 마녀는 도로시가 넘어야 할 위협이었고, 관객은 그녀를 오래 설명받을 필요 없는 악역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뮤지컬은 바로 그 편안한 기억을 흔듭니다. 우리가 한 인물을 악역으로 받아들이는 데에는 얼마나 적은 정보만으로도 충분했는지, 그리고 이야기가 어느 쪽에서 말해지느냐에 따라 선과 악이 얼마나 쉽게 뒤집힐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프리퀄이면서 동시에 비평처럼 느껴집니다. 단순히 이전 이야기를 채워 넣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이야기를 바라보던 우리의 시선까지 다시 무대 위에 올려놓기 때문입니다. 같은 검은 모자와 초록빛 피부를 보더라도, 이 작품을 지나온 뒤에는 그 이미지가 더 이상 예전처럼 단순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무대가 시작하기 전부터 관객이 이미 가지고 있던 기억, 바로 그 기억이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됩니다.

 

괴물이라 불리기 전에

 

 

 엘파바도 처음부터 세상을 등지려던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해치고, 무언가를 무너뜨리고, 자신을 악한 존재로 만들고 싶어 했던 인물은 더더욱 아니었죠. 그녀는 그저 학생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살아가고,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가능성을 믿고 싶어 했던 한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품게 되는 욕망, 나도 누군가에게 제대로 보이고 싶고, 나의 다름이 결함이 아니라 특별함으로 받아들여졌으면 하는 마음. 엘파바의 출발점에는 그런 아주 인간적인 바람이 놓여 있습니다.

 

 쉬즈 대학교에 도착한 엘파바는 이미 많은 시선에 익숙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초록빛 피부는 단순한 외형적 특징이 아니라, 그녀가 어디에 서게 될지를 먼저 결정해버리는 표식처럼 작동합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도 전에 놀라고, 피하고, 웃습니다. 가족 안에서도, 학교 안에서도, 사회 안에서도 엘파바는 늘 먼저 ‘이상한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그렇기에 그녀의 날카로운 말투나 굳은 태도는 성격의 문제만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먼저 상처받아온 사람이 자기 마음을 지키기 위해 세워둔 방어막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점에서 〈The Wizard and I〉는 단순한 희망의 넘버가 아닙니다. 이 곡은 엘파바가 처음으로 자기 가능성을 미래 쪽으로 펼쳐보는 순간입니다. 마담 모리블이 그녀의 마법 재능을 발견하고, 마법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생겼을 때, 엘파바는 처음으로 자신이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초록빛 피부가 결함이 아니라 능력으로 번역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누군가가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이상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아봐줄지도 모른다는 기대. 이 넘버가 밝게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어딘가 안타깝게 들리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이 소녀가 훗날 어떤 이름으로 불리게 될지, 어떤 오해 속에 갇히게 될지, 어떤 방식으로 세상과 멀어지게 될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순수한 출발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앞으로 다가올 고난과 역경에 대한 복선처럼 느껴집니다. 아직 엘파바는 자신이 사악한 마녀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녀는 세상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합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고,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믿고 싶어 합니다.

 

 배우의 몸과 목소리로 보아도 이 넘버는 중요합니다. 평소 엘파바의 말은 방어적이고 단단하게 닫혀 있는 경우가 많지만, 이 곡에서는 처음으로 몸과 목소리가 앞을 향해 열립니다. 눌러왔던 감정이 위로 밀려 올라오고, 미래를 상상하는 순간마다 소리는 더 넓은 공간을 향해 뻗어갑니다. 이때의 벨팅은 단순히 강한 가창력을 보여주는 장치가 아니라, 그동안 자기 안에 가둬두었던 욕망이 무대 밖으로 터져나오는 방식처럼 느껴집니다. 엘파바가 원하는 것은 처음부터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먼저 누군가에게 제대로 보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개인적인 소외는 곧 오즈라는 세계 전체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딜라몬드 교수와 동물들이 점점 목소리를 빼앗기는 설정은, 이 세계가 ‘다른 존재’를 어떻게 조용히 밀어내고 지워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엘파바가 겪는 배제는 그녀만의 특수한 고통이 아니라, 오즈 사회가 작동하는 방식의 일부입니다. 누군가는 피부색 때문에, 누군가는 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누군가는 권력이 정한 질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말할 자리를 잃어갑니다. 엘파바가 이 부조리를 외면하지 못하는 순간,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성장담을 넘어 정치적인 갈등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 지점은 유독 아프게 다가옵니다. 처음부터 악인은 없었다는 말은 어쩌면 너무 단순할지도 모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도 처음부터 악인이 아니었음에도 어떤 세계는 사람을 점점 더 거칠고 외로운 방향으로 몰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이 배신당하고, 선의를 품었던 행동이 오해받고, 자기 자신으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위협으로 해석될 때, 사람은 어디까지 자신의 마음을 지켜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런 순간이 우리에게도 다가온다면, 우리는 정말 끝까지 우리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즈의 시민들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오즈라는 세계가 무서운 이유는 마법사 한 사람의 권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이 세계에는 거대한 권력이 있고, 누군가를 악인으로 만들 수 있는 공식적인 언어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 권력이 정말 힘을 얻는 순간은,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그 언어에 리듬을 맞출 때입니다. 누군가를 이상하다고 웃고, 누군가의 불편함을 놀이처럼 소비하고,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분위기에 기꺼이 몸을 맡기는 사람들. 그런 평범한 감각들이 모여 오즈라는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갑니다.

 

 그런 점에서 〈What Is This Feeling?〉과 〈Dancing Through Life〉는 서로 다른 결의 넘버처럼 보이지만, 사실 같은 질문을 향해 있습니다. 한쪽은 혐오가 어떻게 공동체의 리듬이 되는지를 보여주고, 다른 한쪽은 생각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공동체의 윤리처럼 굳어지는지를 보여줍니다. 두 넘버 모두 겉으로는 밝고 유쾌합니다. 관객은 웃게 되고, 무대는 활기를 띠고, 인물들은 빠른 리듬 안에서 움직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가벼움 때문에 이 장면들은 더 서늘하게 남습니다.

 

 엘파바와 글린다의 첫 관계는 우정보다 혐오에 가깝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사실 처음에는 이해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엘파바에게 글린다는 너무 가볍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고, 글린다에게 엘파바는 너무 날카롭고 불편한 존재입니다. 두 사람이 룸메이트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서로에게는 하나의 불쾌한 사건처럼 다가옵니다.

 

 

 그런데 〈What Is This Feeling?〉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불편함이 너무나 경쾌하고 정확한 리듬을 얻는다는 점입니다.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처럼 보였던 것이, 어느 순간 주변 학생들의 합창과 앙상블 안으로 번져나갑니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마음은 개인의 감정으로 머물지 않고, 함께 즐길 수 있는 분위기가 됩니다. 앙상블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사회적 시선의 몸처럼 움직이고, 학생들의 목소리와 리듬은 엘파바를 조금씩 공동체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이 장면이 불편한 이유는 혐오가 너무 자연스럽고 즐겁게 공연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밀어내는 일이 악의적인 선언처럼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웃음과 박자와 몸짓 속에서 너무 쉽게 공유됩니다. 잘못된 시선이 집단의 동의를 얻고, 그 동의가 다시 하나의 규칙처럼 작동하기 시작할 때, 공동체는 한 사람을 아주 빠르게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마치 외눈박이 마을의 두눈박이처럼, 다르게 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오는 것입니다.

 

 

 〈Dancing Through Life〉는 그 감각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어받습니다. 피예로는 특유의 여유와 매력으로 분위기를 장악하며, 깊게 생각하지 말고 춤추듯 살아가자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이 넘버는 굉장히 자유롭고 즐겁습니다. 무대는 활기를 띠고, 인물들은 움직이며, 피예로의 존재는 쉬즈 대학교 안에 새로운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이 가벼움 안에는 어딘가 위험한 태도가 숨어 있습니다. 불편한 것에 오래 머무르지 말 것. 지금 이 순간이 즐거우면 그 흐름에 몸을 맡길 것. 복잡한 문제를 굳이 깊게 들여다보지 말 것.

 

 이 태도는 오즈의 시민들과 묘하게 닮아 있습니다. 누가 왜 배제되는지, 누가 목소리를 잃어가는지, 누가 사악한 존재로 몰려가고 있는지 끝까지 들여다보려 하지 않는 사람들. 그들은 거대한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라기보다, 눈앞의 화려함과 안정된 질서, 모두가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에 몸을 맡기는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은 때로 자유가 아니라 회피가 됩니다. 그리고 그 회피가 익숙해질수록, 누군가는 점점 더 쉽게 지워집니다.

 

 

 물론 〈Dancing Through Life〉는 관계의 방향이 한꺼번에 바뀌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피예로는 글린다의 관심을 끌고, 보크는 글린다를 좋아하지만 결국 네사로즈에게 향합니다. 네사로즈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선택받았다고 느끼고, 엘파바는 파티장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며, 글린다는 그런 엘파바를 보며 처음으로 죄책감과 연민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피예로와 엘파바의 관계도 이 장면에서 아주 희미하게 열리고, 글린다와 엘파바의 우정 역시 이곳에서 가능성을 얻습니다. 표면은 춤과 웃음으로 가득하지만, 그 아래에서는 훗날 감당해야 할 관계의 빚들이 조용히 쌓이고 있습니다.

 

 무대적으로도 이 두 넘버는 중요합니다. 〈What Is This Feeling?〉에서 앙상블은 집단의 시선을 리듬으로 만들고, 〈Dancing Through Life〉에서 인물들의 동선은 관계의 방향을 계속 바꾸어놓습니다. 누가 누구를 바라보는지, 누가 누구에게 다가가는지, 누가 중심에서 밀려나는지에 따라 장면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이 두 장면에서 오즈의 폭력은 거대한 명령보다 훨씬 일상적인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웃음, 분위기, 춤, 말투, 회피. 그런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을 조금씩 바깥으로 밀어냅니다.

 

 결국 오즈의 질서는 악인의 폭력만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리듬과 무심함입니다. 누군가를 이상하게 여기는 분위기,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 지금 즐거우면 된다는 달콤한 말. 그런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을 악녀로 만들어가는 토양이 됩니다. 악녀는 어느 날 갑자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시선과 웃음과 춤, 그리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무심함 속에서 조금씩 만들어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랑받는 일이란

 

 

 글린다를 볼 때 흥미로운 것은, 그녀가 처음부터 사랑받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웃어야 하는지, 어떤 말투를 써야 분위기가 부드러워지는지, 어떤 표정과 몸짓이 사람들의 시선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지 이미 몸으로 익힌 인물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Popular〉는 단순히 글린다가 엘파바를 꾸며주는 귀여운 장면으로만 남지 않습니다. 이 넘버는 사랑받는 일이 얼마나 구체적인 기술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에 가깝습니다.

 

 글린다는 엘파바를 도와주려 합니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조롱하거나 밀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으로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호의의 방향은 조금 복잡합니다. 글린다가 엘파바에게 건네는 도움은 “너는 그대로 괜찮아”라기보다는, “조금만 고치면 너도 사랑받을 수 있어”에 가깝습니다. 머리를 다듬고, 표정을 바꾸고, 말투를 교정하고,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미지를 새롭게 만들어주는 것. 그 안에는 분명 애정이 있지만, 동시에 세상의 기준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글린다의 몸은 계속 움직입니다. 엘파바의 머리를 만지고, 자세를 고치고, 표정을 만들고, 공간의 리듬을 주도합니다. 무대 위의 글린다는 끊임없이 반짝이고, 설명하고, 장식하며,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의 규칙을 엘파바에게 입혀보려 합니다. 반대로 엘파바는 쉽게 몸을 맡기지 못합니다. 굳어 있고, 어색하게 반응하며, 자신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두 사람의 몸의 차이는 이 장면의 코미디를 만들지만, 동시에 아주 중요한 불편함도 남깁니다.

 

 결국 〈Popular〉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우정의 시작만이 아닙니다. 사회가 한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얼마나 자연스럽게 그 사람을 교정하려 드는지, 그리고 그 교정이 얼마나 자주 호의의 얼굴을 하고 나타나는지를 보여줍니다. 엘파바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엘파바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조금 더 보기 좋고, 조금 더 귀엽고, 조금 더 사람들이 불편해하지 않을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이 넘버는 밝고 사랑스럽지만, 동시에 묘하게 씁쓸합니다. 호의마저도 때로는 세상의 기준을 닮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글린다를 마냥 얄밉게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녀는 나쁜 마음으로 엘파바를 바꾸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받는 방법을 가장 좋은 선물처럼 건네고 있습니다. 다만 그녀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모습으로 고쳐주는 일이 아니라는 것. 사랑은 때로 상대를 더 보기 좋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보기 불편한 모습까지도 그 사람의 일부로 견디는 일이라는 것.

 

 

 그런데 2막에 이르면 이 문제는 글린다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1막의 글린다가 사랑받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2막의 글린다는 마침내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모두가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의 말을 듣고, 그녀의 미소에서 안심을 얻습니다. 오즈는 엘파바를 위험한 존재로 밀어내는 동시에, 글린다를 ‘착한 마녀’라는 이름으로 더 높이 올려놓습니다. 겉으로 보면 그녀는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원하던 관심과 사랑을 얻었고, 사람들의 중심에 섰으며, 피예로와의 약혼까지 공적으로 축복받습니다.

 

 하지만 〈Thank Goodness〉의 표면적인 축하 안에는 이상한 불안이 섞여 있습니다. 글린다는 웃고 있고, 사람들은 그녀를 사랑하며, 무대는 그녀를 희망의 얼굴처럼 세웁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정말 행복해서 나오는 것인지, 행복한 사람처럼 보여야 하기 때문에 유지되는 것인지는 쉽게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분명 달콤한 일이지만, 모두가 원하는 모습으로 계속 존재해야 한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글린다는 이제 사랑받기 위해 반짝이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계속 반짝여야 합니다.

 

 이렇게 보면 〈Popular〉와 〈Thank Goodness〉는 서로 멀리 떨어진 넘버가 아니라 하나의 선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Popular〉에서 글린다는 사랑받는 기술을 엘파바에게 가르칩니다. 하지만 〈Thank Goodness〉에서 그 기술은 글린다 자신을 가두는 역할이 됩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슬픈지, 흔들리는지, 죄책감을 느끼는지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저 글린다가 계속 웃고, 밝게 말하고, 모두에게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바랍니다. 결국 그녀는 착한 마녀가 되었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착한 마녀처럼 말하고 웃고 반짝여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부분이 중요한 이유는 글린다가 엘파바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갇혀가기 때문입니다. 엘파바가 ‘사악한 마녀’라는 이름 안에 갇힌다면, 글린다는 ‘착한 마녀’라는 이름 안에 갇힙니다. 한 사람은 비난과 공포의 대상이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랑과 희망의 상징이 됩니다. 하지만 두 이름 모두 한 사람의 복잡한 내면을 지워버린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습니다. 미움만 사람을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사랑도, 기대도, 칭찬도 한 사람을 아주 단단한 역할 안에 가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글린다의 이야기는 단순히 밝고 사랑스러운 인물이 성장하는 이야기로만 볼 수 없습니다. 그녀는 사랑받는 법을 너무 잘 알고 있었고, 결국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 사랑은 그녀를 온전히 자유롭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사회가 요구하는 밝음, 유쾌함, 보기 좋은 선함,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미소가 글린다의 몸 위에 겹쳐집니다. 〈Popular〉에서 그녀가 엘파바에게 입히려 했던 세상의 기준은, 〈Thank Goodness〉에 이르러 글린다 자신이 벗기 어려운 옷이 됩니다.

 

 결국 글린다는 마침내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바로 그 순간부터 모두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존재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이 구조가 들어오면 이 작품은 엘파바 한 사람의 비극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미움받는 사람이 어떻게 괴물이 되는가와 동시에, 사랑받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을 잃어가는가를 함께 보여주는 여성 투톱의 이야기로 깊어집니다. 그리고 바로 그 점 때문에 글린다는 엘파바의 반대편에 선 인물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같은 세계에 갇힌 또 하나의 중심 인물로 남습니다.

 

아름다워서 위험한 곳, 에메랄드 시티

 

 

 어쩌면 이 장면이야말로 브로드웨이 대형 뮤지컬이 가진 정수를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엘파바와 글린다가 에메랄드 시티에 도착하는 순간, 무대는 그야말로 화려함과 예술적 과잉의 극치를 향해 달려갑니다. 선명한 색채, 다채로운 의상, 끊임없이 움직이는 앙상블,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것처럼 펼쳐지는 무대. 〈One Short Day〉는 관객에게 오즈라는 세계가 얼마나 매력적인 공간인지를 몸으로 느끼게 만드는 넘버입니다.

 

 이 장면에서 에메랄드 시티는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엘파바와 글린다에게 이곳은 꿈꾸던 중심부입니다. 마법사가 있는 곳,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고, 모든 것이 빛나며, 어쩌면 자신들의 바람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고 믿게 만드는 도시. 그래서 이 장면의 에너지는 굉장히 들떠 있습니다. 인물들은 걷는 것이 아니라 거의 떠밀리듯 도시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관객 역시 그 리듬과 색채 안에서 자연스럽게 오즈의 매혹에 동화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이 이 장면을 더 무섭게 만듭니다. 에메랄드 시티의 화려함은 단순한 볼거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계가 왜 사람들에게 믿음의 대상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치에 가깝습니다.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을 쉽게 의심하지 않습니다. 반짝이는 도시, 질서정연한 군중, 환상적인 무대, 모두가 함께 즐거워하는 분위기 앞에서 우리는 잠시 질문을 멈추게 됩니다. 무엇이 감춰져 있는지, 누가 밀려나고 있는지, 이 아름다운 질서가 누구의 침묵 위에 세워져 있는지를 잊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즈는 아름답기 때문에 위험합니다. 이 세계는 폭력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매혹적이어서 더 쉽게 받아들여집니다. 사람들은 반짝이는 질서를 보면, 그 질서가 숨기고 있는 폭력까지도 잠시 아름다운 세계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싶어 합니다. 눈앞의 스펙터클이 너무 강렬할 때, 우리는 어느새 무엇이 중요한지 스스로 잊어가며 그 세계 안에 동화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대형 상업 뮤지컬로서의 힘과도 연결됩니다. 무대는 관객을 압도할 만큼 아름답고, 음악은 즉각적으로 감정을 끌어올리며, 앙상블은 도시의 생명력을 온몸으로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힘을 단순한 즐거움으로만 사용하지 않습니다. 먼저 관객을 매혹한 뒤, 바로 그 매혹이 얼마나 쉽게 권력의 얼굴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에메랄드 시티가 아름다울수록, 우리는 더 조심스럽게 물어야 합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인가, 아니면 진실처럼 보이도록 아름답게 꾸며진 무대인가.

 

 

 그래서 〈One Short Day〉는 마냥 즐거운 도시 방문의 넘버로만 남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엘파바와 글린다가 오즈의 중심부에 들어가는 순간이자, 관객이 이 세계의 가장 매혹적인 거짓말을 직접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화려한 색채와 역동적인 무대, 브로드웨이식 스펙터클의 황홀함 속에서 우리는 잠시 엘파바가 보려 했던 문제를 잊을 뻔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이 아름다운 도시의 시민들처럼, 너무 쉽게 빛나는 것의 편에 서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에메랄드 시티의 매혹이 더 위험해지는 순간은, 그 화려함 뒤에 있는 마법사의 실체가 드러날 때입니다. 오즈의 권력은 진짜 마법보다 연출에 가깝습니다. 거대한 얼굴, 위압적인 기계 장치, 확신에 찬 목소리, 그리고 마담 모리블이 만들어내는 공식적인 언어들. 사람들은 그것을 진실로 받아들이지만, 사실 그 안에서 작동하는 것은 능력이라기보다 믿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 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마법은 하늘을 나는 주문이 아니라, 누가 착하고 누가 위험한지 정해버리는 이야기의 힘입니다.

 

하늘로 오르는 것은

 

 

 중력을 거부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말 그대로라면 아래로 끌어당기는 힘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장면에서 엘파바가 거부하는 것은 단순한 물리적 중력만은 아닙니다. 그녀를 계속해서 아래로 붙잡아두려는 세계의 규칙, 침묵하라고 말하는 권력, 다수의 편에 서야 안전하다는 압력, 그리고 모두가 정상이라고 믿는 질서까지 함께 거부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엘파바는 마법사의 실체를 목격합니다. 오즈가 얼마나 매혹적인 얼굴 뒤에 거짓을 숨기고 있었는지, 동물들이 왜 목소리를 빼앗기고 있었는지, 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드는 일이 얼마나 손쉽게 이루어지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 순간 그녀에게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습니다. 모른 척하고 돌아가거나, 모든 것을 본 사람으로서 행동하거나. 글린다는 남는 쪽을 선택하고, 엘파바는 떠나는 쪽을 선택합니다. 두 사람 모두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남으려 하지만, 이 순간부터 둘은 같은 길을 갈 수 없게 됩니다.

 

 〈Defying Gravity〉가 강렬한 이유는 단지 고음이나 플라잉 장치 때문만은 아닙니다. 물론 이 장면은 무대적으로 엄청난 쾌감을 줍니다. 음악은 점점 위로 밀어붙이고, 조명은 엘파바의 몸을 더 선명하게 고립시키며, 관객은 그녀가 하늘로 떠오르는 순간 숨을 삼키게 됩니다. 하지만 그 벅참은 단순한 승리의 감정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해방이면서 동시에 추방입니다.

 

 

 엘파바는 자유로워져서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땅 위에서 더 이상 설 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에 떠오릅니다. 아래에는 군중이 있고, 권력이 있고, 자신을 붙잡으려는 글린다가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혼자 떠오른 엘파바가 있습니다. 그녀는 모두의 위에 선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누구의 곁에도 서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 수직적 이미지는 그래서 단순한 볼거리가 아니라, 엘파바의 사회적 위치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치처럼 느껴집니다.

 

 중력을 거부한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들을 거부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것,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는 것, 공동체 안에서 안전하게 인정받는 것. 그런 것들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누리고 싶은 권리입니다. 그런데 엘파바는 바로 그 당연한 권리들을 포기하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진실을 본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행동한다는 것. 비록 그것이 모두를 등지는 길이라 해도, 자신이 옳다고 느끼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 그 선택은 숭고하지만, 동시에 너무 외롭습니다.

 

 그래서 이 넘버는 엘파바가 가장 강해지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외로워지는 순간입니다. 그녀는 더 이상 숨지 않고, 더 이상 자신을 설명하려 애쓰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자리에서 멀어집니다. 사람들은 그녀의 비행을 자유로 보겠지만, 오즈의 기록 속에서 그 비행은 곧 위험한 존재의 탄생으로 남을 것입니다.

 

 관객은 분명 해방감을 느낍니다. 마음 한쪽에서 같이 날아오르는 듯한 쾌감도 느낍니다. 그러나 동시에 압니다. 그녀가 떠오른 자리 아래에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있는 땅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가장 높이 올라간 순간, 엘파바는 가장 깊은 고립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름이 현실이 되는 시간

 

 1막이 엘파바가 ‘사악한 마녀’로 불리기 시작하는 순간이라면, 2막은 그 이름이 실제로 세계를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를 보여줍니다. 〈Defying Gravity〉에서 엘파바는 하늘로 떠올랐지만, 그 비행은 그녀를 자유롭게만 만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순간 이후 오즈는 그녀를 더 이상 한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제 위험한 존재, 도망자, 공동체의 질서를 위협하는 적이 됩니다.

 

 이 지점부터 작품은 조금 더 복잡하고 씁쓸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엘파바는 여전히 누군가를 해치기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계속해서 무언가를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선의는 점점 더 꼬여갑니다. 누군가를 도우려는 행동은 다른 누군가의 상처가 되고, 잘못을 되돌리려는 마법은 또 다른 비극을 만들어냅니다. 1막에서 그녀의 다름이 오해받았다면, 2막에서는 그녀의 행동마저 의도와 다르게 해석됩니다.

 

 

 그 과정에서 주변 인물들의 운명도 〈오즈의 마법사〉 속 익숙한 이미지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네사로즈는 동쪽의 마녀라는 이름에 가까워지고, 보크의 운명은 양철 나무꾼의 모습으로 이어집니다. 엘파바가 네사로즈를 돕고자 했던 마법은 보크의 삶을 바꾸어놓고, 관계의 어긋남은 더 이상 작은 오해로만 남지 않습니다. 이 지점은 〈The Wicked Witch of the East〉라는 장면이 독립적인 대표 넘버처럼 크게 소비되지는 않더라도, 서사적으로는 꽤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엘파바의 선의가 어떻게 계속 비극으로 번역되는지, 그리고 이 작품이 어떻게 우리가 알고 있던 오즈의 설정들을 다시 조립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반면 글린다는 오즈의 중심 안으로 들어갑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착한 마녀로 부르고, 희망과 안정의 얼굴로 받아들입니다. 앞에서 보았듯 그 자리 역시 자유롭지만은 않습니다. 엘파바가 비난 속에서 이름에 갇혀간다면, 글린다는 사랑 속에서 또 다른 이름을 감당하게 됩니다.

 

 

 피예로와 엘파바의 관계 역시 더 위험한 감정으로 변해갑니다. 이제 두 사람의 마음은 단순한 끌림이나 설렘으로만 머물 수 없습니다. 엘파바는 이미 오즈의 적이 되었고, 그녀와 가까워진다는 것은 그 질서 밖으로 함께 밀려날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사랑조차도 더 이상 안전한 감정이 아닙니다. 이 세계 안에서는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의 편에 서는 일마저 정치적인 선택이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점점 도로시의 이야기가 가까워집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오즈의 마법사〉의 시간, 집이 떨어지고, 구두가 남고, 마녀가 죽었다고 기록되는 이야기의 순간들이 조금씩 이 뮤지컬 안으로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사건들은 더 이상 단순한 동화의 장면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모험이었던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실과 오해와 낙인의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생깁니다.

 

 그래서 2막은 1막의 해방감을 그대로 이어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해방 이후에 감당해야 할 대가를 보여줍니다. 하늘로 오른 사람은 다시 땅으로 쉽게 내려오지 못하고, 착한 마녀가 된 사람은 더 이상 마음대로 슬퍼할 수도 없습니다. 악녀가 된 이후의 시간은 엘파바 한 사람의 추락이 아니라, 이름이 사람을 어떻게 바꾸고, 관계를 어떻게 망가뜨리며, 진실을 얼마나 멀리 밀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간입니다.

 

선의가 실패한 뒤

 

 

 2막의 엘파바는 1막의 엘파바와는 조금 다릅니다. 〈Defying Gravity〉에서 그녀는 분명 자기 자신을 향해 날아올랐습니다. 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고, 모두가 정해놓은 길에서 벗어났으며, 자신을 억누르던 세계의 중력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택 이후에 그녀에게 남은 것은 단순한 자유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고립과 오해, 그리고 끝없이 꼬여가는 결과들이었습니다.

 

 〈No Good Deed〉는 그래서 엘파바의 흑화 장면이라고만 보기에는 너무 아깝습니다. 이 넘버는 한 사람이 갑자기 악해지는 순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하게 행동하고 싶었던 사람이, 끝내 자신의 선의마저 믿지 못하게 되는 순간에 가깝습니다. 엘파바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계속 누군가를 도우려 했습니다. 동물들이 목소리를 잃어가는 것을 외면하지 못했고, 네사로즈를 돕고 싶었고, 피예로를 구하고 싶었고, 잘못된 세계를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그녀의 행동은 늘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를 향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선의가 계속 실패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실패로 해석됩니다. 누군가를 구하려는 행동은 또 다른 상처가 되고, 잘못을 되돌리려는 마법은 더 큰 오해를 낳습니다. 엘파바가 움직일수록 사람들은 그녀를 더 두려워하고, 그녀가 진심을 다할수록 세계는 그 진심을 더 악의적으로 번역합니다. 이쯤 되면 비극은 단순히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낳았다”는 정도에 머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자신의 마음이 왜곡되어 돌아오는 상황 속에서, 사람은 결국 자기 마음 자체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No Good Deed〉의 핵심은 분노만이 아닙니다. 이 넘버 안에는 분노보다 더 깊은 피로와 절망이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려고 했는데 왜 계속 모두가 다치는가. 누군가를 살리고 싶었는데 왜 더 많은 것을 잃게 되는가. 내가 한 일이 정말 선한 일이었는가. 아니면 처음부터 나의 선의라는 것 자체가 오만이었는가. 엘파바는 이 질문들 앞에서 더 이상 단단하게 서 있지 못합니다. 그녀가 무너지는 것은 악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선하게 살고 싶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목소리의 질감은 특히 중요합니다. 〈Defying Gravity〉의 소리가 위로 뻗어가는 상승의 에너지였다면, 〈No Good Deed〉의 소리는 훨씬 더 거칠고 불규칙하게 찢어집니다. 주문처럼 뱉어지는 말들, 피예로의 이름을 부르는 절박함, 분노와 후회가 뒤섞인 발성은 더 이상 아름답게 정리된 희망의 형태가 아닙니다. 이 넘버에서 엘파바의 목소리는 곧게 날아오르기보다, 자기 안에서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튀어나옵니다. 그래서 듣는 사람도 단순히 “강하다”고 느끼기보다, 한 사람이 더 이상 버틸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감각을 받게 됩니다.

 

 무대 위의 엘파바 역시 더 이상 1막의 영웅적인 실루엣만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늘로 떠오르던 몸은 이제 절박하게 무언가를 붙잡으려는 몸이 됩니다. 주문을 외우고, 이름을 부르고, 상황을 되돌리려 하지만, 그 움직임은 점점 통제보다 붕괴에 가까워집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엘파바가 강한 마녀로 보이는가가 아니라, 강해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 얼마나 지쳐 있는가입니다. 세상은 그녀를 무서운 존재로 부르지만, 무대 위에 있는 것은 사실 계속해서 실패한 선의를 끌어안고 있는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넘버는 작품 전체에서 가장 아픈 지점 중 하나로 남습니다. 〈Defying Gravity〉가 “나는 나로 살겠다”는 선언이었다면, 〈No Good Deed〉는 “그렇게 살아도 아무도 구할 수 없다면 나는 무엇인가”라는 절규에 가깝습니다. 1막의 엘파바가 세상의 중력을 거부했다면, 2막의 엘파바는 그 선택 이후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결과의 무게를 온몸으로 맞고 있습니다. 자유에는 대가가 있고, 진실을 선택한 사람에게도 실패는 찾아옵니다. 이 작품은 그 사실을 꽤 냉정하게 보여줍니다.

 

 결국 〈No Good Deed〉에서 엘파바는 악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선하게 살고 싶었던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갑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위험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한 사람을 악하다고 부르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도 자신의 선의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엘파바의 목소리가 거칠게 흔들리는 이유는, 그녀 안에 악이 자라나서가 아니라,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마음이 더 이상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길을 가지 못한 사람들의 노래

 

 

 서로를 바꾸었지만, 다시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요. 〈For Good〉은 바로 그 지점에 놓인 노래입니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서로를 만났고, 서로에게 깊은 흔적을 남겼지만, 끝내 같은 길을 선택하지는 못했습니다. 한 사람은 오즈의 바깥으로 사라져야 하고, 다른 한 사람은 오즈의 안쪽에 남아야 합니다. 둘은 서로를 완전히 구하지 못했고, 같은 방식으로 용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넘버는 단순한 화해의 노래로 들리지 않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미안함도 있고, 고마움도 있고, 뒤늦은 이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정확히 말하면, 이 곡은 화해보다 인정에 가까운 노래입니다. “이제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는 말이 아니라, “너를 만나기 전의 나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고백에 가깝습니다.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어도, 서로가 서로의 삶을 바꾸어놓았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글린다는 엘파바를 통해 사랑받는 것보다 중요한 진실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남는 것, 착한 마녀라는 이름을 지키는 것, 사람들의 기대에 맞춰 반짝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반대로 엘파바는 글린다를 통해 자신이 끝내 잃고 싶지 않았던 부드러움을 마주합니다. 세상과 싸우고, 오해받고, 계속해서 밀려나는 와중에도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자기 안의 연약한 부분을 보게 되는 것이죠.

 

 

 이 장면이 참 안타까운 이유는, 두 사람이 서로를 가장 깊이 이해하게 되는 순간에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왜 이렇게 늦게 도착하는 걸까요. 더 일찍 알았더라면, 더 일찍 솔직했더라면, 더 일찍 서로의 두려움을 알아봤더라면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하지만 어떤 관계는 함께 이어지기 때문에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끝내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화해도 용감한 일이지만, 어쩌면 서로를 인정하고 보내주는 일은 더 성숙한 끝맺음일지도 모릅니다. 붙잡는 것이 사랑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어떤 순간에는 놓아주는 쪽이 더 큰 사랑에 가깝습니다. 엘파바와 글린다는 서로의 삶을 바꾸었지만, 서로의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각자의 이름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서로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이 장면은 그래서 조용히 마음을 찌릅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그동안 쌓아온 모든 갈등과 무게를 결국 이 장면으로 데려오기 위해 달려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엘파바가 악녀로 불리게 되는 과정, 글린다가 착한 마녀라는 역할 안에 갇히는 과정, 두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엇갈리다가 끝내 서로에게 남긴 흔적을 인정하는 과정. 그 모든 시간이 〈For Good〉에 이르러 조용히 가라앉습니다.

 

 이 노래가 특별한 이유는 무대 위의 이별이 어느 순간 객석 쪽으로 건너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엘파바와 글린다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내 삶을 지나간 사람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끝까지 함께하지는 못했지만 나를 바꾸어놓은 사람들, 붙잡지 못했지만 사라지지도 않은 관계들, 헤어진 뒤에야 더 분명해지는 마음들. 무대는 정답을 주지 않지만, 그런 질문들을 관객의 마음 안에 조용히 남깁니다.

 

 그래서 〈For Good〉은 이별의 장면이면서도 이상하게 완성의 장면처럼 느껴집니다. 둘은 헤어지지만, 그 헤어짐은 관계의 실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가 서로 안에 남는 방식으로 관계는 계속됩니다. 함께할 수 없지만 사라지지도 않는 것. 끝났지만 끝난 뒤에야 더 선명해지는 것. 어쩌면 관계라는 것은 늘 그런 식으로 안타깝게 맺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관계는 끝까지 함께했기 때문에 깊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통과한 뒤 다시는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에 깊어집니다. 엘파바와 글린다의 마지막 노래가 오래 남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서로를 붙잡지 못했지만, 서로를 잃어버린 것도 아닙니다. 각자의 길로 멀어지면서도, 이미 서로의 안에 남아버린 사람들. 〈For Good〉은 그 안타깝고도 성숙한 관계의 끝을,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완성합니다.

 

이름은 남지만, 사람은 사라진다

 

 우리에게 〈오즈의 마법사〉라는 세상은 어떤 이미지로 남아 있을까요. 도로시와 토토, 겁쟁이 사자와 양철 나무꾼, 허수아비, 노란 벽돌길과 에메랄드 시티. 그 세계는 오랫동안 화려하고 아름다운 판타지로 기억되어 왔습니다. 낯선 곳으로 떠난 소녀가 친구들을 만나고, 각자의 결핍을 마주하며, 결국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그 안에서 서쪽의 마녀는 설명이 많이 필요 없는 악역처럼 존재했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주인공들이 넘어야 할 어둡고 기괴한 존재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바로 그 익숙한 세계의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가 알고 있던 판타지의 밝은 표면 아래에, 사실은 이런 삶과 선택과 오해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사자와 양철 나무꾼, 허수아비와 도로시가 등장하기 전, 이미 누군가는 목소리를 잃어가고 있었고, 누군가는 사랑받기 위해 자기 모습을 바꾸려 했고, 누군가는 진실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악녀가 되어야 했습니다. 이 재해석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기존 이야기를 뒤집는 데서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기억해온 세계에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어떤 이야기가 밝고 아름답게 피어나기 위해서는, 그 아래에 말해지지 않은 시간들이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뿌리가 있기에 그 위에 꽃이 자라나는 것처럼, 오즈의 찬란한 판타지 아래에는 엘파바와 글린다가 감당해야 했던 어둡고 복잡한 시간들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뿌리는 결코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상처와 오해, 정치적 필요와 집단의 믿음,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자기 자신으로 남고 싶은 마음이 복잡하게 엉켜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이야기를 알고 난 뒤의 오즈는 이전과 똑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뮤지컬이 〈오즈의 마법사〉의 아름다움을 무너뜨리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밝은 이야기는 그 뒤에 놓인 어두운 시간을 알게 되었을 때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도로시의 모험 뒤에는 엘파바의 고립이 있었고, 착한 마녀의 미소 뒤에는 글린다의 침묵이 있었으며, 사악한 마녀라는 이름 뒤에는 한때 인정받고 싶었던 한 소녀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환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복잡하고 단단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어쩌면 화려한 무대 뒤편에서도 이런 이야기들은 계속 벌어지고 있을지 모릅니다. 아니, 무대 밖 현실에서도 우리는 비슷한 장면들을 너무 자주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군가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할 때, 누군가의 이야기가 듣기도 전에 정리되어버릴 때, 많은 사람들이 편한 결론을 위해 한 사람의 복잡한 삶을 지워버릴 때. 현실과 진실은 때때로 잔혹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슬픈 이야기 속에서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 어떤 의미를 붙잡아야 하는지 계속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작품이 가진 이야기는 특별합니다. 인물들이 가진 슬픔과 관계, 그 충돌과 어긋남을 단순히 비극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무대 위에서 아름답게 승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가볍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곱씹을수록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듯, 더 많은 감상과 질문과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어쩌면 무대라는 예술이 가진 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앞에서 실제로 사람이 노래하고, 움직이고, 무너지고, 다시 버티는 모습을 통해, 허구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 현실의 감각처럼 다가오는 것 말입니다.

 

 결국 이 뮤지컬을 지나온 뒤에는, 더 이상 서쪽의 마녀를 예전처럼 쉽게 부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악역의 표식처럼 받아들였던 것들이, 이제는 한 사람의 삶과 오해와 상처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남아 있지만, 그 이름이 가리키던 사람은 달라집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가 그 사람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무대가 끝난 뒤에도 남는 것은 한 사람의 해명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믿어버렸던 이름들에 대한 뒤늦은 의심입니다. 착한 마녀와 사악한 마녀, 영웅과 악역, 사랑받는 사람과 밀려난 사람. 그 이름들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제 예전처럼 단순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같은 초록빛 피부, 같은 검은 모자, 같은 빗자루. 그런데 그 안에 다른 시간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위키드〉를 지나온 뒤의 서쪽 마녀는 더 이상 예전의 악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이름은 남았지만, 그 이름을 부르는 우리의 마음이 조금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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